경빈 박씨 (장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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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짜 = 2012-06-28
| 확인날짜 = 2012-07-21
}}</ref> 빙애가 [[사도세자]]에게 살해되었다는 것을 이유로, [[노론]] [[벽파]]에서는 그녀의 아들 [[은전군]] 찬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에도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원한을 품을수 있다는 점을 주목했다. 그런 이유로 [[은전군]]은 [[노론]]에 의해 택군의 대상이 되었지만, [[1777년]] [[7월]]과 [[8월]] [[노론]]벽파 측에서 매수한 자객이 체포되면서 적발당하고, 은전군 역시 역모의 수괴로 몰려 1778년 사사된다.
 
=== 사후 ===
[[1774년]](영조 50) [[7월 9일]], 1774년판 선원속록(璿譜續錄)에 실리게 된다.
 
훗날 [[대한제국]](大韓帝國)이 개창되고 1899년(고종 36년, 광무 3년) 9월 1일 사도세자가 왕으로 추존되어 장종(莊宗)의 [[묘호]]를 받음에 따라<ref>《조선왕조실록》고종 39권, 36년(1899 기해 / 대한 광무(光武) 3년) 9월 1일(양력) 3번째기사</ref>, 그 궁녀 신분이었던 박씨도 [[9월 12일]] 종1품 [[내명부|귀인]](貴人)으로 진봉되었다<ref>《조선왕조실록》고종 39권, 36년(1899 기해 / 대한 광무(光武) 3년) 9월 12일(양력) 1번째기사</ref>. 그리고 2년 뒤인 1901년(고종 38년, 광무 5년) 10월 17일 정1품 [[내명부|빈]]으로 또 추증되어 '''경빈'''(景嬪)의 작호를 받았다<ref>《조선왕조실록》고종 41권, 38년(1901 신축 / 대한 광무(光武) 5년) 10월 17일(양력) 1번째기사</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