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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3년 계축옥사로 인목대비의 아버진 김제남이 사사되고, 인목대비의 아들 영창대군이 강화도로 유배되자, 그는 이를 반대했다. 그러나, 이어 1614년 영창대군까지 살해되자, 이수광은 관직을 떠나 낙향하였다.
 
이후 두문불출하고, 중국의 전적(典籍)과 자기의 견문을 토대로 동남아시아와 유럽 사정, [[로마 가톨릭교회|천주교]] 지식을 소개한《[[지봉유설]]》(1614년)을 지었다.<ref name="송건호"/>{{Rp|306}} (→[[조선의 대외 관계]]) 1616년 [[순천]][[부사]]에 임명되어 발령되었고발령되었는데, 1618년에는 인목대비가 폐비되어 서궁에 유폐되기까지 하자, 지방관 임기 3년을 마친 후에는 관직을 사양하고 [[수원]]으로 내려가 학문 연구와 집필에 전념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재등용되어 도승지·대사간을 지내고 이 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조선 인조|인조]]를 [[공주시|공주]]로 모셨다. 당색에 치우치지 않은 관계로 [[인조 반정]] 이후에도 [[서인]]계열의 견제를 받지 않았다. [[이괄의 난]]이 진압된 뒤 1625년(인조 3년) [[사헌부]][[대사헌]]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