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계대원군: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40번째 줄:
[[1849년]] [[조선 헌종|헌종]]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그의 셋째 아들 원범이 [[순원왕후]]에 의해 낙점되어 순조의 양자 자격으로 [[조선 철종|철종]]으로 등극하였다. 이때 그는 작위가 없어서 [[1849년]] [[6월 17일]] 먼저 [[의정부]][[좌의정]] [[김도희]](金道喜) 등의 건의로 상계군, 풍계군의 계자 돌림을 고려하고, [[충청남도]] [[전의]]의 지역명에서 따서 전계군(全溪君)에 피봉되었다가, 축호와 사식을 송나라 [[조윤양|복황]](濮皇)과 [[수왕]](秀王) 및 본조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조선 원종|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의 전례에 따라 다시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으로 추봉하고, 묘(墓)도 다시 정비하고, 묘 앞에 [[신도비]]를 세우게 하고, [[전계궁|가묘]](家廟, 전계궁)를 중건하여 신주는 [[불천지위]]로 정하고 [[영평군 (1828년)|영평군]]과 그 후손으로 봉사<ref>제사를 받듦</ref>하게 하였다. 한편 숙종 때의 왕족 중에도 같은 작호인 전계군(全溪君)의 작위를 받은 이박(李溥)이라는 왕족이 있었다.
 
처음 그의 장인과 처조, 처증조부를 [[증직|증]] [[영의정]], [[증직|증]] [[좌찬성]], [[증직|증]] [[판서]]로 각각 추증하는 일을 놓고도 이름있던 가문인 그의 본처 전주최씨의 친정만 증직하자는 논의가 나왔다가, 생가도 추증해야 한다는 반론이 나와 첩 용성염씨의 친정 3대도 증직이 내려졌다.
 
== 묘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