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천보 습격: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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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천보 김일성이 북한 김일성이라는건 남한학계에서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음. 시대에 뒤떨어진 가짜김일성론은 삭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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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commons.wikimedia.org/wiki/Category:Pochonbo_Incident 보천보 사건 당시 신문 기사 보기] Wikimedia Commons
 
== 이 사건에 대한 후일의 논란 ==
 
보천보 사건을 일으킨 김일성은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제1로군(第一路軍)의 2군(二軍) 6사장(六師長)으로, 1937년 11월 13일 만주국군 제7단과의 전투에서 사살되었다는 것이 일제시대 자료 전산화로 근래에 발굴된 많은 당시 기록과<ref>[http://iss.ndl.go.jp/books/R100000039-I000063819-00 「金日成匪 討伐詳報」] 만주국군(満州国軍) 기관지(機関誌) 월간(月刊) 『철심(鐵心)』 1937년 11월 15일號 (滿洲國 治安部 參謀司 調査課編) pp.70~75.</ref><ref name="chi">[http://db.history.go.kr/id/had_187_1500 鮮外情報 - 共匪 金日成 射殺의 件] 治安狀況(昭和 12年) 第38報 (1937년 11월19일).</ref><ref>[https://www.jacar.archives.go.jp/aj/meta/image_B02130117600 東亜局第二課関係/第七章 支那及満州ニ於ケル共産運動 : 昭和 12年(1937년) 12月 1日] p.49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2130117600、執務報告 昭和十二年度東亜局第二課及第三課(東亜-3)(外務省外交史料館)」;<br/>支那及滿洲ニ於ケル共産運動, 外務省 東亞局 第二科, 昭和 13年 (1938년) 6월</ref> 신문 기사에서<ref name="news">[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371118v00_03.pdf 共匪 金日成 被殺 - 十三日 滿洲國 討伐軍에], 매일신보 1937년 11월 18일 3면 2단;<br/>[http://botw.egloos.com/11253843 鮮滿國境住民の 苦惱 今ゃ 解消, 共産匪 金日成の 死] 경성일보 (京城日報) 1937년 11월 18일 조간 7면;<br/>[http://srchdb1.chosun.com/pdf/i_archive/index.jsp?Y=1937&M=11&D=18&x=81&y=11 反滿 항일의 首魁, 金日成 被捉 참수. 討匪隊와 격전 5시간], 조선일보 1937년 11월 18일 조간 2면;<br/>[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7111800209102003&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37-11-18&officeId=00020&pageNo=2&printNo=5829&publishType=00010 金日成被殺(김일성피살)?], 동아일보 1937년 11월 18일 조간 2면;<br/>[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371219y00_02.pdf 비적(匪賊) 준동기(蠢動期)에 비(備)하야 국경경비진(國境警備陣)을 강화(强化)] 매일신보 1937/12/19, 02면 05단 : 대안의 비적 현황은 금하래의 만주국 토벌군으로 말미암아 왕봉각(王鳳閣), 김일성(金日成)이 뒤를 이어 너머젓슴으로 ...;<br/>[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380223y00_02.pdf 共匪 崔賢一黨 潰滅, 對岸治安 明朗化] 매일신보(每日申報) 1938/02/23, 2면 : 조선 국경 대안에서 공비(共匪)로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 잇든 김일성이는 작년 가을에 총살되고 이번에는 최현이도 총살되여 ... </ref> 확인된다. 신원도 당시 나이 36세 가량이며, 함경남도 태생으로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나왔다고 하는 등 북한 김일성과 전혀 다르다. 1937년 6월 4일의 보천보 사건 이전에도 6사장 김일성의 신원이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는데, 1936년 11월 27일자 매일신보는 김일성의 나이가 37~8세 가량이며, 함경남도 혜산진 출신으로 해삼위(海蔘威, 블라디보스톡)에서 공산당의 지령을 받아 만주로 왔다고 했고<ref>[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361127y00_03.pdf 『하모니카』演奏하며 男女混合舞踊會 一派의 큰 襲擊만 前後十二回 共匪金日成派 內幕] 매일신보 1936-11-27 / 3면 6단 : 1936년 당시 활동하던 빨치산 김일성은 나이가 37~8세 가량으로 카이제르 수염을 길렀고, 함남 혜산진 출신이라 함.</ref>, 만주국군 기관지 월간 『철심(鐵心)』 1937년 5월호에는 김일성이 30세 가량의 모스크바 공산대학 출신이라 하였다.<ref>[http://iss.ndl.go.jp/books/R100000039-I000400831-00 東邊道匪討行 / 從軍記者團] 만주국군(満州国軍) 기관지(機関誌) 월간(月刊)『철심(鐵心)』1937년 5월호 (満州国治安部,治安部参謀司第二課 編) pp.98~114 : 제6사장 김일성은 모스크바 공산대학 출신으로 30세 미만의 청년이란 풍문이었다하며 동변도에서는 제일 큰 세력이라고도 적혀 있다.</ref> 이러한 기록들과 소련군 88여단 관계자들의 후일 증언을 참고하면 보천보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은 다른 인물이며, 북한 김일성은 자신이 한 일로 대대적으로 선전하여 [[김일성 가짜설|남의 공적을 가로챈 가짜]]이다.
 
[[파일:보천보 김일성 사살.jpg|섬네일|왼쪽|보천보 사건 주역 6사장 김일성이 1937년 11월 13일 사살되었다는 1937년 11월 18일자 경성일보 기사]]
 
1938년 2월 23일자 매일신보와 조선일보는 최현도 전사했다고 보도하였다.<ref>[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380223y00_02.pdf 共匪 崔賢一黨 潰滅, 對岸治安 明朗化] 매일신보(每日申報) 1938/02/23, 2면<br/>[http://srchdb1.chosun.com/pdf/i_archive/index.jsp?Y=1938&M=2&D=23&x=88&y=14 撫松縣(무송현)에 반거 共匪(공비)두목 崔賢 사망설 만주국군의 일파 궤멸] 조선일보 1938.02.23 석간 2 면<br/>이명영(李命英, 1928-2000),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新文化社, 1974) p.292</ref> 보천보 사건 당시 동아일보는 최현은 나이 50이 넘었으며, 비적활동을 수십년간 했다고 보도했으므로<ref name="choi">[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7060800209102005&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37-06-08&officeId=00020&pageNo=2&printNo=5666&publishType=00010 장백밀림(長白密林)을 근거(根據)로 국경선(國境線)에 출몰(出沒)] 동아일보 1937-06-08</ref> 북한의 [[최현 (1907년)|최현(崔賢, 1907~1982)]]과 다른 인물일 가능성이 상당하지만 김일성의 경우와 달리 이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다.
 
북한 김일성이 진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전설의 김일성 장군 이름이 1919년 3.1운동 무렵, 늦어도 1920년대 초에는 널리 알려져 있었다는 사실은<ref>이명영(李命英, 1928-2000), "金日成列傳 (新文化社, 1974)" p.21 第一章 옛「김일성 장군」의 傳說과 正體</ref> 한사코 인정하지 않는다. 동아일보가 1937년 보천보 사건 당시 두 차례 호외를 발행한 때문에<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7060500200101001&edtNo=1&printCount=1&publishDate=1937-06-05&officeId=00020&pageNo=1&printNo=s1&publishType=00030 咸南普天堡를 습격] 동아일보 1937.06.05 호외(號外) 제1 ;<br/>[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7060500200201001&edtNo=1&printCount=1&publishDate=1937-06-05&officeId=00020&pageNo=1&printNo=s2&publishType=00030 普天堡 襲擊 續報 / 追擊警官과 衝突] 1937/06/05 동아일보 호외(號外) 제2</ref> 김일성 이름이 비로소 전국적으로 유명해졌고, 북한 김일성이 그 당사자가 맞으므로 가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어느 것도 사실이 아니다. 동아일보 호외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하루 아침에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일도 없었으며, 북한 김일성은 그 사건의 당사자인 6사장 김일성도 아니면서 자신이 한 일이라고 거짓 주장을 하고 있을 뿐이다.
[[파일:보천보 김일성 사살 조선일보 기사.jpg|섬네일|오른쪽|250px|보천보 사건 주역 6사장 김일성이 1937년 11월 13일 사살되었다는 1937년 11월 18일자 조선일보 기사. 같은 날 동아일보, 매일신보 등도 6사장 김일성의 전사를 보도했다.]]
문맹률이 80~90%를 넘나들고 교통 통신 사정이 열악하여 배달망도 제대로 갖추기 어려웠던 당시에 신문 독자라고 해봐야 전국적으로 몇 만명 정도 밖에 되지도 않았다. 당시는 전인구의 80% 이상이 농어촌에서 바깥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도 모르고 담쌓고 살 때이니 신문에 이름이 몇번 난다고 하루 아침에 전국적으로 유명해지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일제시대에 이승만, 김구나 전설의 김일성 장군의 이름이 유명했던 것은 신문에 이름이 자주 보도 되어서가 아니라 학교나 장터 같은 곳을 통해 그 이름이 오랜 기간 구전으로 퍼졌던 때문이다. 더구나 당시 동아일보는 9개월간의 장기 정간 끝에 1937년 6월 3일에 복간하여<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7060200200101001&officeId=00020 今日(금일), 本報解停(본보해정) 今日夕刊(금일석간)부터 發行] 동아일보 호외 1937.06.02</ref> 흩어진 독자들을 다시 모집해야 할 상황에 있었다. 다른 신문들과 달리 유독 동아일보만 6월 5일에 전날 밤 일어난 보천보 사건으로 두 차례나 호외를 간행한 것은 그 사건을 엄청나게 중요하게 여겨서라기보다 복간을 홍보하기 위한 전단지로 배포할 목적이었을 것이다. 신문의 배달 속도가 느리던 일제시대에 이런 류의 사건을 몇 시간 빨리 보도하기 위해 추가 경비를 들여가며 호외를 간행한 사례도 없다. 시간을 다투는 속보를 필요로 하던 시대도 아닌데다 호외를 발행해도 신속한 배포의 어려움 때문에 전국적으로 전달되는 속보의 역할을 할 수도 없었으니 서울 지역에서나 일부 배포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8.15 해방이 되었을 때의 일을 봐도 알 수 있다. 8.15 당일은 사람들이 대부분 해방이 된 줄도 몰랐고, 시골이야 말할 것도 없고 서울 시내도 평소와 다름없이 조용했다고 한다. 8.15 당일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 나오는 사진으로 알려진 것들도 실제로는 모두 16일 이후의 사진이라 한다. 심지어는 해방이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도 상당할 정도로 민도도 낮았다.<ref>[http://office.kbs.co.kr/mylovekbs/archives/79870 8.15 광복 특집 : 기억의 재구성 - 1945.8.15] KBS 1TV 2011. 8. 14(일) 밤 8시 방송<br/>[http://www.dailymotion.com/video/xt1nay_8-15-%EA%B4%91%EB%B3%B5-%ED%8A%B9%EC%A7%91-%EA%B8%B0%EC%96%B5%EC%9D%98-%EC%9E%AC%EA%B5%AC%EC%84%B1_school 8.15 광복 특집 : 기억의 재구성] (영상 보기)</ref> 해방과 같은 경천동지할 사건에도 반응이 이랬다면 그보다 8년 전의 고작 보천보 사건 같은 정도는 대부분 사람들이 모르고 지나갔을 것으로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시절에 호외니 속보니 하는 것이 대단한 의미를 가질 수도 없다.
 
보천보 사건은 규모가 좀 컸다는 것 외에는 1920~30년대에 만주 무장단체들이 조선국경을 침입하여 벌인 무수히 많았던 약탈 사건들<ref>[http://theme.archives.go.kr/next/government/viewGovernmentArchivesEvent.do?id=0001563980&docid=0027126862 1920년~1936년간 국경 3도 비적 누년 상황표 (國境三道 匪賊 累年 狀況表)] (대정9년 -소화11년) 조선총독부 경무국 경무과 ([http://theme.archives.go.kr/next/common/archWebViewer.do?singleData=Y&archiveEventId=0027126862 원문 바로보기])<br/>[http://theme.archives.go.kr/next/government/viewGovernmentArchivesEvent.do?id=0001563997&docid=0027126469 국경지방에서의 치안 상황 : 제73회 제국의회(帝國議會) 설명자료] 昭和12年(1937년) 조선총독부 경찰청 경무국 : [http://theme.archives.go.kr/next/common/archWebViewer.do?singleData=Y&archiveEventId=0027126469#6 (원문 바로 보기)] - p.6 : 1932년~1937년 9월 기간 대안비적 선내침입누년표(對岸匪賊 鮮內侵入 累年表) / p.7 : 압록강·두만강 대안 마비적(馬匪賊) 출몰 누년표 (1932~1937.9)</ref> 중의 하나일 뿐이므로 곧 잊혀졌고, 해방당시 이 사건을 거론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일각에서 주장하는 대로 이 사건을 신문이 크게 보도하여 김일성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면, 그 유명한 6사장 김일성이 전사했다는 것도 대다수 신문이 보도했으므로<ref name="news"/> 그가 전사했다는 것도 사람들이 잘 알고 있었어야 한다. 그러나 해방 당시 사람들은 보천보 사건도, 김일성이 전사했다는 것도 거의 알지 못했다. 큰 의미를 부여하기도 어려운 이 사건이 유명해진 것은 북한 김일성이 권력을 잡고 난 후 자신의 항일투쟁 업적으로 대대적으로 선전하기 시작한 후부터이다. 김일성 본인이 1942년에 직접 지은 『항련 제1로군 약사(抗聯第一路軍略史)』에도 보천보 사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그 자신도 당시는 이 사건을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f>[http://218.10.232.41:8080/was40/detail?record=46&channelid=55726&presearchword= 金日成, 抗联第一路军略史 (抗聯第一路軍略史)], 东北抗日联军 史料(下), 东北抗日联军 史料 编写组, 中国共産党史 资料出版社, 1987, pp.665~679<br>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00008860 자료발굴 1942년에 김일성이 육필로 쓴 항일연군 제1로군 약사 (번역)] 역사비평 1992년 여름호(통권 19호), 1992.5, pp.403-414<br>
[http://news.joins.com/article/3018979 (다시쓰는 한국현대사 7) 東北항일聯군 활동기 金日成 자필 보고서] 중앙일보 1995.02.20 종합 8면</ref>
 
1935년 2월에 [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7HIL_A1910_1_0026163 이홍광(李紅光, 1910~1935)]이 일으킨 [[동흥습격사건|동흥(東興) 습격 사건]]은<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5021400209202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35-02-14&officeId=00020&pageNo=2&printNo=5100&publishType=00020 平北(평북)에 人民革命軍侵入(인민혁명군침입) 民家(민가)에 衝火(충화)코 掠奪(약탈)] 동아일보 1935.02.14<br/>[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5021500209102014&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35-02-15&officeId=00020&pageNo=2&printNo=5101&publishType=00010 被襲東興邑(피습동흥읍) 民家(민가) 六十戶(육십호)에서 掠奪(약탈)] 1935.02.15 동아일보 2면<br/>[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502160020910200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35-02-16&officeId=00020&pageNo=2&printNo=5102&publishType=00010 被襲(피습)된 東興邑(동흥읍)의 被害(피해) 死傷十三(사상십삼), 拉去十名(납거십명)] 동아일보 1935.02.16<br/>[http://db.history.go.kr/id/npjj_1935_02_16_x0002_0820 즉사 중경상 납거 등, 피해자 23명, 사자 8, 중경상 5, 납거 10명, 동흥 습격사건 後報/ 주민측 피해/ 공산군을 계속 추적 중] 조선중앙일보 1935년 02월 16일 2면</ref><ref>[http://www.i815.or.kr/data2/ganhaeung/thesis/1994/199413.pdf 장세윤, 「이홍광연구(李紅光硏究)」] 『한국독립운동사연구』 8, (독립기념관독립운동사연구소, 1994) pp.337~369</ref> 보천보 사건보다 더 큰 충격을 주었고, 매일신보와 동아일보는 보천보 사건을 제2 동흥사건(第二東興事件)이라고 보도할 정도였지만<ref name="maeil"/><ref name="choi"/>, 오늘날 동흥사건에 대해 아는 사람은 전문연구자 외에는 거의 없다. 이를 보아도 보천보 사건이 실제로는 어느 정도의 의미를 가질만한지 알 수 있고, 김일성의 중요한 항일투쟁 업적이라는 북한의 대대적 선전 때문에 터무니없이 부풀려져 알려진 것이다. 더구나 이 사건 때문에 연루된 [[조국광복회]]의 구성원들 수백명까지 검거되어 처벌받는 소위 [[혜산사건]](惠山事件)으로 지하 조직이 궤멸되었다.<ref name="sa"/><ref name="wa"/><ref name="suh"/>
 
== 각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