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신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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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은언군]]과 함께 [[제주도]]로 유배되었지만 [[풍토병]]에 걸렸고, 유배 2년만인 [[1771년]] [[음력 3월 29일]]에 병사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17세였다. 시신은 도성으로 운구되었다가, 그해 [[6월]] [[경기도]] [[양주군]] [[금촌면]] 이패리(현 [[남양주시]] 이패동) 계암(鷄岩) 해질머루부락 서쪽 손좌(巽坐)에 모친 [[숙빈 임씨|양제 임씨]] 묘소 근처에 안장되었다. [[1774년]](영조 50) [[5월 12일]] 특명으로 복직되었고, 형 [[은언군]] 인도 복권되었다. 그의 모친 [[숙빈 임씨|양제 임씨]]는 정조 즉위 후 [[1776년]](정조 즉위) [[8월 3일]]에 [[양제]]로 복작되었다. 정조 즉위 후 그는 [[현록대부]]에 추증되었다.
 
=== 사후복권 ===
[[1776년]] [[조선 정조|정조]] 즉위 직후 정조에 의해 [[1777년1776년]](정조 1) [[12월4월 10일]] [[조선 영조|영조]]의 유지를 이유로 [[연령군]]에게 훤에게 사후 양손자로 적통(嫡統) 입적(入籍)되었다. 그러나 사후 양자라서 낙천군의이미 [[연령군]]의 양자가 된 [[낙천군]]의 제사를 은신군의 후계자들이 모시느냐 여부를 놓고 논란이 되었으며, [[남연군]]의 후손들은 사도세자와의 관계를 더 강조하는 차원에서 사도세자, 장조를 유독 강조했다.<ref>연령군과 낙천군의 제사만 받들고, 사도세자를 강조하였다. 이는 선원속보 및 남연군 후손들의 묘비명, 신도비명에도 장조의 별자, 사도세자의 별자 은신군의 후손이라 명시하였다.</ref> 이 문제는 20세기에 가서야 남연군의 후손들이 연령군, 낙천군을 선조로 인정하고 연령군-낙천군-은신군으로 계통이 확정되었다.
사후 복권되었다. 시신은 바로 [[제주도]]에 안장되었다가 운구되어 [[1779년]] [[양주군]] [[금촌]](楊州郡金村) 이패리(二牌里, 현 [[남양주시]] [[이패동]] 해질모루부락 서쪽) 계암(鷄巖) 손향(巽向), [[숙빈 임씨]] 묘소 근처로 이장되었다. 그의 어머니 숙빈 임씨의 묘소는 후일 실전되었다. 은신군의 묘소가 설치되면서 [[남양주시|미금면]] 이패리 중 은신군의 묘소가 있던 지역을 왕자궁(王子宮) 부락이라 부르게 되었다. 은신군은 후에 다시 [[양주군]] [[화도면]](후일의 [[남양주시]] [[화도읍]])으로 개장되었다. 20세기에 이르러 은신군과 군부인 남양홍씨의 시신은 화장되어 [[흥선대원군]] 묘소 근처의 납골묘에 안치되었으며, 신도비와 비석, 석물들은 [[2005년]] [[1월]] 양부 [[낙천군]], 양증손 [[흥친왕]] 등의 묘비와 함께 모두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되었다.
 
[[1776년]] [[조선 정조|정조]] 즉위 직후 정조에 의해 [[1777년]](정조 1) [[12월]] [[연령군]]에게 사후 양손자로 적통(嫡統) 입적(入籍)되었다. 그러나 사후 양자라서 낙천군의 제사를 모시느냐 여부를 놓고 논란이 되었으며, [[남연군]]의 후손들은 사도세자와의 관계를 더 강조하는 차원에서 사도세자, 장조를 유독 강조했다. 이 문제는 20세기에 가서야 연령군-낙천군-은신군으로 계통이 확정되었다.
 
은신군 역시 아들이 없어 [[1815년]](순조 15) [[조선 순조|순조]]의 특명으로 [[인평대군]](麟坪大君)의 6대손인 이병원의 차남 이채중을 그의 양자로 입양시켜 후사를 이었다.<ref>인평대군이 [[능창대군|능창군 이전]]의 양자로 입양되었으므로, 호적상으로는 [[능창대군|능창군 이전]]의 7대손이 된다.</ref> 이채중은 이름을 이구(李球)로 바꾸고 바로 [[남연군]](南延君)에 봉작되었다.
 
이복 형인 [[조선 정조|정조]]가 [[영조]]의 뒤를 이어 즉위하면서 [[1779년]](정조 3년) [[1월]] [[증직|증]] [[현록대부]](顯祿大夫)에 추증되었다. 바로[[1779년]] [[12월 12일]] 소민공(昭愍公)의 시호(諡號)가 내려졌다가 고종 때 충헌으로 개정되었다. [[1786년]] 정조는 그의 [[신도비]]를 직접 쓰기도 했다. 고종 때 가서 [[1871년]](고종 8년) [[2월 28일]] 시호가 충헌공(忠獻公)으로 개시되었다.
 
=== 사후 ===
사후 복권되었다. 시신은 바로 [[제주도]]에 안장되었다가 운구되어 [[1779년]] [[11월 5일]] 묘지가 형편없다는 이유로 정조에 의해 다시 장지를 간택하여 [[양주군]] [[금촌]](楊州郡金村) 이패리(二牌里, 현 [[남양주시]] [[이패동]] 해질모루부락 서쪽) 계암(鷄巖) 손향(巽向), [[숙빈 임씨]] 묘소 근처로 이장되었다. 그의 어머니 숙빈 임씨의 묘소는 후일 실전되었다. 은신군의 묘소가 설치되면서 [[남양주시|미금면]] 이패리 중 은신군의 묘소가 있던 지역을 왕자궁(王子宮) 부락이라 부르게 되었다. 은신군은 후에 다시 [[양주군]] [[화도면]](후일의 [[남양주시]] [[화도읍]])으로 개장되었다. 20세기에 이르러 은신군과 군부인 남양홍씨의 시신은 화장되어 [[흥선대원군]] 묘소 근처의 납골묘에 안치되었으며, 신도비와 비석, 석물들은 [[2005년]] [[1월]] 양부 [[낙천군]], 양증손 [[흥친왕]] 등의 묘비와 함께 모두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되었다.
 
고종 때 가서 [[1871년]](고종 8년) [[2월 28일]] 시호가 충헌공(忠獻公)으로 개시되었다. [[1871년]](고종 8년) [[5월 3일]] 묘비가 세워져 양증손자 [[이재원]]이 묘비문을 짓고, 양증손자 [[이재면]]이 글씨를 썼다.
 
[[2000년]] 이후 남연군의 6대손인 이청이 가족묘지를 화장하여 [[흥선대원군]] 묘소 좌측에 납골묘에 봉안할 때 납골묘로 봉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