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천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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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낙천군 내외의 생일, 기일 제사는 [[남연군]] 가문에서 일단 받들었다. 또한 낙천군의 묘 또한 남연군의 후손들이 벌초하고 돌보았다. 우선 [[1819년]](순조 19) [[1월]] 낙천군 제사 받드는 것에 관한 문제가 나왔을 때는 낙천군이 연령군의 양자로 입양되었기 때문에 남연군과는 인연이 있다<ref name="yigsa"/>고 보았다.
 
남연군의 후손들은 남연군 후손들의 묘비문이나 신도비 등을 쓸 때 사도세자의 아들 은신군의 후손임을 강조했었다. [[남연군]]의 후손들은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왕실 직계와 더 가까운 점을 강조하기 위해, [[조선 장조|장조]]의 후손임을 강조하다가 20세기 이후에 [[연령군]]과 낙천군을 가계상 선조로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 남연군 후손들의 사도세자 강조와 낙천군 회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