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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Former House of Yi's Residence Former Akasaka Prince Hotel.jpg|thumb|200px|left|도쿄 아카사카 이은 저택]]
1945년 8월 12일에 이은은 도쿄 [[고쿄]]에서 열린 일본 황족들의 긴급회의에 참석하여 [[쇼와 천황]]으로부터 무조건 항복의 뜻을 전해들었으며, 8월 15일에 도쿄에서 광복을 맞았다.<ref>{{뉴스 인용|제목=세월이여 왕조여 조선조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 회고록 (50) 일본의 무조건 항복|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409050032920900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4-09-05&officeId=00032&pageNo=9&printNo=11982&publishType=00020|출판사=경향신문|저자=이방자|날짜=1984-09-05}}</ref> 종전 이후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에 의하여 황족들은 면세특권을 박탈당하였고, 거액의 재산세와 인플레이션으로 인하여 이은은 경제적으로 곤란한 처지에 처하였다. 도쿄 저택을 [[참의원 (일본)|참의원]] 의장 공관으로 대여하였으며, 별장도 매각하는 등 가산을 처분하였다.<ref name="가난">{{뉴스 인용|제목=세월이여 왕조여 조선조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 회고록 (52) 가난한 평민으로|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4091000329209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4-09-10&officeId=00032&pageNo=9&printNo=11986&publishType=00020|출판사=경향신문|저자=이방자|날짜=1984-09-10}}</ref> 일제 패망 이후 호적 소재지를 기준으로 한국인과 일본인이 나뉘게 되었다. 따라서 한국인 남성과 결혼한 일본인은 한국인이 되고, 일본인 남성과 결혼한 조선인은 일본 국적이 되었다. 이은과 마사코는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재일한국인]]으로 등록하였지만 이승만 정권이 호적이 없다는 이유로 대한민국 국적을 인정하지 않아 무국적 생활을 하게 되었다.<ref>{{뉴스 인용|출판사=동아일보|제목=평민이 된 이은씨의 근황|저자=신동준|날짜=1959-09-20|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9092000209106001&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59-09-20&officeId=00020&pageNo=6&printNo=11489&publishType=00010}}</ref> 당시에 황실 후손들은 일반 호적과 별도의 호적을 가지고 있었는데 대한민국 정부에서 황실 호적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ref>{{뉴스 인용|출판사=뉴시스|제목=“황실복원은 시대착오” 조선조 마지막 공주 이해경 여사 뉴욕서 쓴소리|저자=유세진|날짜=2012-03-10|url=http://www.minjokcorea.co.kr/sub_read.html?uid=9784&section=sc13}}</ref> 1947년 10월 18일에 일본 황족들이 [[신적강하]]를 당하여 신분과 특권을 상실하게 되어 이은도 평민이 되었다.<ref name="가난"/> 황족의 복식에 대해 논의하는 황족회의에 참석했던 영친왕은 궁내청 관리가 ‘죄송하지만, 황족이 아닌 분은 나가달라’고 말하자 얼굴이 하얗게 질려 비틀거렸다.<ref>{{뉴스 인용|제목=조선 왕실의 일제 36년...日황족 대우,천황가 다음 부자로|저자=배진영|출판사=월간조선|날짜=2016-10-19|url=http://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1&mcate=M1004&nNewsNumb=20161021753&nidx=21754&dable=10.1.4}}</ref> 이 무렵 이은은 자택 근처 고급 요정에서 술상을 차려놓은 채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게이샤]]를 모델로 누드를 그리는 것에 심취하였다. [[이방자]]는 남편이 누드화를 그린다는 사실에 대하여 품위를 손상시키는 일로 여겼다. 현재까지 공개된 이은의 누드화는 3점이다.<ref>{{뉴스 인용|제목=영친왕이 그린 누드화 공개|출판사=경향신문|날짜=1991-11-15|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1111500329114007&edi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1-11-15&officeId=00032&pageNo=14&printNo=14229&publishType=00010}}</ref>
 
해방 이후 그는 [[일본]] 유학, 일본군 장군이었던 점을 두고 친일파로 몰려 지탄받았다. [[이방자]]는 일부 사람들이 그를 친일파로 지목하고 [[미 군정]]에 진정했다는 것이다.
 
[[이방자]]에 의하면, "해방이 되자 일부 사람들이 왕위 계승권 문제를 들고 나왔다 한다. 이제는 군주가 직접 정치를 하거나 한국의 왕실이 다시 복권되는 것도 아닌데, 영왕은 평생을 [[일본]]에서 지냈고 일본 황족의 딸과 결혼한 친일파이므로 구 황실 계승권은 마땅히 의친왕이 물려받아야 한다는 진정서를 [[미 군정]]장관 [[윌리엄 딘]] 소장 앞으로 보낸 사람들이 있었다.<ref>이방자, 《나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 이 마사코입니다》 (강용자, 김정희 번역, 지식공작소, 2013) 274페이지</ref>"고 한다.
 
===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