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강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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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9년]] 6월에 일길찬 신홍(信弘)이 반란을 일으켜 죽였다. 내란에 대한 기록이 1건이 있으나, 국내에서의 백성의 생활에 대해서는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다고 여겨진다.
 
[[880년]] 9월에는 왕이 측근들과 함께 월상성의 누각에동쪽 월상루에 올라 주변을 바라보니, 민가에서 피리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기록하는 등 당시 풍년이 계속되어 백성들이 편안하게 지냈던 모습을 전하고 있다.「삼국유사」기이·처용랑 망해사조의 첫머리에서도, 헌강왕의 시대에는 도로부터 해변에 이르기까지 집이 쭉 늘어서 있는데 초가집이 없고, 노래나 피리의 소리가 이어졌으며 날씨도 좋았다고 적고 있다.
 
「부상략기(扶桑略記)」에는 [[884년]] 9월(음력)에 신라의 배 45척이 대마도를 습격했지만, 일본은 다자이후에서 격전을 벌여 신라군을 요격하고 위기를 벗어났다. 전쟁 후 포로가 된 신라인 현춘(賢春)을 심문 하니, 전년부터 계속된 흉작으로 백성들이 굶는 사태가 계속되었고, [[신라]]에서는 왕성이 불안한 상태라고 대답하고 있다. 이 기록은 「삼국사기」에서는 헌강왕 10년에 해당되지만, 헌강왕 10년의 기술은 [[삼국사기]]에 기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