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강화 회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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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기대를 하였고, 김규식도 [[1918년]]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 발표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파리강화회의]]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종결과 함께 전범국 처리를 논의하던 것이었다. 각지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나 강화회의에서는 답을 주지 않았고, [[1919년]] [[7월 14일]] 김규식은 [[프랑스 대혁명]] 기념일 행사에 한국대표로 참석할 수 있도록 [[프랑스]] [[외교부]]에다 초청장을 보내달라고 서신을 보냈으나, 응답은 행사가 끝난 다음에 왔다. 이때 심한 [[두통]]으로 눈이 안 보일 정도까지 갔다.<ref name="in33">한국사 인물 열전 3(한영우 지음 | 돌베개 | 2007) 266페이지</ref><ref name="lee1111">강만길, 《조선민족혁명당과 통일전선》 (역사비평사, 2008) 414페이지</ref>
 
열강의 그 어느 국가나, 그 누구도 아무도 김규식 일행의 [[한국]] 독립 청원을 호응해주지 않게 되면서 김규식은 크게 실망하였고, [[8월]] [[프랑스]] 파리에서 [[미국]]으로 건너갔다.<ref name="in33"/> [[8월 9일]] 김규식은 김복, [[여운홍]]과 함께 [[뉴욕 주|뉴욕]]으로 향했다. 선실에서 김규식은 활동 보고서를[[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쉬지않고 타이프를 쳤다 한다.<ref name="in33"/>
 
== 중국의 산둥 문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