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크 스코필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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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출생과 성장 ===
[[1889년]] [[3월 15일]]에 [[영국]] [[워릭셔 주]]의 [[럭비 (워릭셔 주)|럭비]]에서 태어났다. [[1905년]]에는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으나, 성적은 좋지 못하였고, 집안이 여의치 않아 진학을 하지 못했다. 결국, 그는 [[체셔 주]]의 한 농장에서 식사를 제공받는 조건으로 고용되었고, 이 무렵에 그는 [[노동자]]의 비참한 생활과 그들의 앞날에 관하여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1907년]]에는 [[캐나다]]로 이민하였고, [[토론토 대학교]] 온타리오 수의과 대학에 입학한다. 그러나, [[1910년]]에 [[소아마비]]를 앓아 지팡이를 짚게 되었다. [[1911년]]에는 [[토론토 대학교]]에서 수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13년]] [[9월]]에 앨리스 스코필드(Alice Schofield)와 결혼하다.
 
=== 한국 생활 ===
[[1916년]]봄 에 [[세브란스 병원|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장이었던 [[올리버 알 에비슨]]으로부터 [[일제강점기]]의 [[한국]]으로 와 달라는 권유 서신을 받다. 스코필드 박사는 11월에 아내와 함께 한국으로 왔으며, [[연세대학교|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서 세균학과 위생학(衛生學)을 강의했다. 그는 [[영어]]를 할 줄 알았던 목원홍(睦源洪)으로부터 [[한국어]]를 배워 [[한국어]]로 강의하였다.
 
[[1917년]] 그는 한국에 온 지 1년 만에 ‘선교사 자격 획득 한국어 시험’에 합격한다. 또한 자신의 한국식 이름도 만들었는데, 바로 ‘석호필(石虎弼)’이다. 그의 성인 ‘石’은 그의 종교적 굳은 의지를 의미하고, ‘虎’는 호랑이, ‘弼’은 돕는다는 뜻으로, 한국인을 돕겠다는 마음을 나타낸 이름이다. 스코필드는 한국의 여러 지명인사와 교제를 넓혔다. 그중에서 특히 [[기독교]]적인 사회운동을 [[기독교청년회|YMCA]] 총무직으로 실천하던 [[월남 이상재|이상재]](李商在) 선생, [[김정혜 (1868년)|김정혜]](金貞蕙) 여사를 존경하였고, 뒷날 김정혜 여사를 수양 어머니로 섬겼다.
 
[[1919년]] [[2월 5일]] [[3·1운동]] 거사 준비로 [[이갑성]](李甲成) 씨와 몰래 만났으며, 3.1운동을 위한 해외 정세파악일을 맡게 된다. 또한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만세시위를 하는 [[민중]]들과 일본의 시위자에 대한 탄압을 이갑성씨의 의뢰에 따라 사진으로 찍고, 글로 적어 해외에 알리기도 하였으며, 4월에는 수원군 [[제암리 학살 사건|제암리]]에 가서 일본군이 제암리 주민들을 제암리교회에 몰아넣고 [[학살]]한 [[제암리학살사건]]으로 잿더미가 된 현장을 스코필드 자신의 표현대로 '(일본의 만행에 대한 분노로)떨리는 손'으로 촬영,〈제암리/수촌리에서의 잔학 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또한 5월 [[일본인]]이 운영하는 영자신문 'Seoul Press' 지에 서대문 형무소에 대한 글을 올리고 당시 노순경, [[유관순]](柳寬順), [[어윤희]](魚允姬), 엄영애 등이 갇혀있던 서대문 형무소(여자 감방 8호실)를 직접 방문한다. 수감자에 대한 [[고문]] 여부를 확인한 뒤 하세가와 총독과 미즈노 정무 총감 등을 방문하여 일본의 비인도적 만행의 중지를 호소하였다. 물론 그가 활발한 독립운동 기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영일동맹]]으로 영국계 캐나다 사람인 스코필드를 일본에서 간섭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