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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기독교적 이념은 합리주의와 17세기 고전정신의 조화 앞에서 물러갔고, 이 이념은 [[계몽주의]] 사상이라는 18세기의 지적 운동의 충격을 받고 더욱 물러가게 되었다. 계몽주의 사상은 인간이 노력하면 이상적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확신을 토대로 하였고, 이러한 확신은 서양사에 있어서 하나의 새로운 현상이 되어 인간생활의 세속화는 이제 바람직한 것으로 간주되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기성 종교, 특히 [[기독교]]는 ‘이성의 시대’의 일관한 도전에 직면하여 수세에 몰리게 되었던 것이다. 계몽주의의 씨앗은 영국에서 뿌려져 거기서 싹이 돋아났으나 꽃이 핀 것은 프랑스에서이다. [[볼테르]]의 「영국에서 부친 서한」은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 전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드니 디드로|디드로]]는 [[백과전서|백과사전]]을, [[몽테스키외]]는 『[[법의 정신]]』을 만들어 계몽사상을 고취했다.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2세]],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는 전형적인 계몽적 전제군주라 하겠다. 프리드리히 2세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오스트리아 계승 전쟁]]에서 [[마리아 테레지아]]를 기습했고, [[7년 전쟁]]을 통하여 프러시아를 유럽의 최강국으로 만들었으며, 폴란드를 분할하여 프러시아 왕국을 확장하는 데 성공하였다. 뿐만 아니라 바바리아 계승 전쟁에선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들 [[요제프 2세]]의 계획을 좌절시켰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2세의 위대함은 그의 군사적 성공에 있다기보다는 계몽주의적 이념을 십분 호흡하여 이른바 ‘선의의 전제 군주’가 됐다는 사실에 있다. 마리아 테레지아도 국민 사이에 덕망이 높았으며, 빈이 음악의 중심지가 되었던 것도 그의 치하에 이루어진 업적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계몽주의 사상은 점차 과격한 면을 드러내게 되어, 루소는[[루소]]는 [[이성]] 만능의 풍조에 반발하고 낭만주의의[[낭만주의]]의 시조가 되었다.
 
[[미국 독립 전쟁|미국의 독립혁명이나독립혁명]]이나 [[프랑스 대혁명은대혁명]]은 계몽주의의 소산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계몽주의 운동의 약점을 드러낸 점 또한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1776년에 미국은 민주주의의 대원칙을 천명하고 독립, 이어서 이러한 원칙을 최대한 정치에 응용함으로써 커다란 진보를 이룩하였다. 프랑스 대혁명은 어떤 의미에서는 계몽주의 운동의 좌절이요, 이성의 효능이 그 한계를 명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리하여 프랑스 대혁명은 [[나폴레옹]] 같은 군인에게 정권을 제공하였다. 1799년의 쿠데타를 통해 나폴레옹이 프랑스의 정권을 장악함으로써 전세계는 다시 시련 속에 빠져들어갔으며, 18세기는 혼란 속에 저물어갔다.
 
한편 18세기의 근동은 러시아의 남하정책과 오스트리아의 진출에 의해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제국]]에 쇠퇴의 그림자가 감돌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수차에 걸친 러시아와의 전쟁 결과로서 [[크림 반도를반도]]를 상실하는 등 제국은 약체화하였다. 이즈음 발칸의[[발칸 반도]]의 불안이 증대함에 따라서 유럽 열강의 터키를 둘러싼 대립은 격화 일로에 있었다. 이란 방면에는 투르크와 대립하고 있던 [[사파비 왕조]]가 18세기 전반부터 아프간족의 침입으로 혼란상태에 빠졌다. 18세기 후반경에는 [[카자르 왕조]]가 성립되었으나 유럽 세력의 압박에 직면했다. 또한 인도에는 영국·프랑스의 식민지 항쟁이 격화되었다. [[플라시 전투]] 결과 영국의 인도 지배가 결정적으로 되었으며, 영국의 [[영국 동인도 회사|동인도회사]]는 통치기관으로서 벵갈 지방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중국에서는 청조(淸朝)[[청나라]]강희(康熙)[[강희제]]·옹정(雍正)[[옹정제]]·건륭(乾隆)[[건륭제]] 3대의 황금시대를 맞이하여 영토도 중국 사상 최대의 제국으로 확대되었다. 18세기 전반의 지정은제(地丁銀制)에 의한 세제의 획기적인 진보와 한인(漢人)한인을 병용(倂用)의함께 등용하는 행정체제로 중앙집권 체제는 커다란 발전을 보게 됐다. 또한 농업 생산력의 현저한 향상과 농촌 공업의 발달도 내외의 상업을 발전시켰다. 청조는 해외 무역을 엄격한 통제하에 두고 오직 공행(公行)이라는 관허상인(官許商人)들로관허상인들로 하여금 행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제한에도 불구하고 유럽에의 수출무역은 대단히 성하여져 대량의 외국 은(外國銀)이은이 유입되어 화폐경제의 발달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거대한 상업자본의 활동을 촉진시켰다. 그러나 건륭제 치세 후반에 들어와서는 관료의 부패, 재정의 핍박에 의한 중세정책(重稅政策)으로중세정책으로 사회불안이 증대하였고, 백련교도(白蓮敎徒)의[[백련교도의]] 등으로 청조가 점차 쇠약해지자 유럽 열강은 이 틈을 타 강력하게 진출해 왔다. 이 시대의 문화는 청조의 한인 지식층에 대한 회유책으로 학예의 장려나 대편찬 사업이 행해졌다. 한편 청조의 배만(排滿)·반청(反淸) 사상의 탄압으로 [[유교|유학(儒學)]]에서는 고전의 실증적 연구 방면에서 많은 진보를 보였으나, [[경세학(經世學)]]으로서 유교사상의 생명은 거의 소멸된 느낌이 있었다. 이와 같은 비판정신의 위축은 결국 과거의 문헌에 대한 실증적 연구에 몰두하게 하여 [[고증학(考證學)]]이 일어났다.
 
=== 유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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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의 국제 전쟁 ====
18세기 유럽 외교정책의 기본은 여전히 제국간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8세기는 동시에 제국의 세력 범위가 재조직된 세기이기도 했다. 먼저 에스파냐의 계승전쟁을 경계로 하여 종래 유럽에서 최강의 국가로 보였던 프랑스가 쇠퇴기에 들어섰다는 것과 에스파냐가 옛날의 국위(國威)가국위가 아니라는 것――여기에 대해 독일제국[[독일 제국]] 내 하나의 영방(領邦) 국가에 불과했던 프로이센이 에스파냐의[[에스파니아 왕위 계승 계승전쟁을전쟁]]을 계기로 급속히 대두되었다는 것, 러시아의 세력 또한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 등이다. 따라서 세력의 균형을 유지한다는 것은 이전에 비해서 한결 곤란해졌다. 많은 동맹이 각 나라의 사정에 따라서 체결되기도 하고 해소되기도 하여 복잡한 관계를 나타냈다. 오랫동안 격렬하게 반목하고 있던 합스부르크가(家)[[합스부르크 가]]의 오스트리아와 부르봉가의[[부르봉 가]]의 프랑스가 동맹하는 등 외교혁명이라[[외교혁명]]이라 불리는 사태도 생겼다. 전쟁은 대부분의 경우 두 나라간의 전쟁이 아니라 전(全) 유럽 여러 나라를 강제적으로 전란 속에 휘말리게 하는 성격으로 발생했다. 더욱이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될 점은 유럽 본국간의 전쟁은 동시에 식민지간의 전쟁으로 확대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18세기의 전쟁이 왕가간의왕가 간의 전쟁이라는 성격을 차차 불식(拂拭)불식하고, 각국의 중상(重商)주의적중상주의적 식민정책의 충돌이 때때로 전쟁의 최대 원인의 하나가 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따라서 17세기 말 이래 해상의 패권을 장악하고 정력적으로 해외 진출을 기도해 온 영국은 항상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어 최대의 강국(强國)이강국이 되었다. 미국 식민지가 독립하여 영국의 지배 아래서 이탈한다는 타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18세기 말에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유럽을 선도(先導)하는선도하는 입장을 구축하고 있었다.
 
==== 러시아의 근대화 ====
17세기 말까지 러시아는 서유럽 여러 나라와 별로 깊은 관계를 갖지 않은 채 여전히 동방적 존재였으며, 농노제를 기초로 하는 특이한 절대주의 국가였다. 이와 같은 러시아를 근대화하고 서유럽화하는 곤란한 사업에 착수하고 러시아로 하여금 열강의 일각을 점하게 하는 데 성공한 사람은 [[표트르 1세]](피터 1세)였다. 그는 내정을 개혁하고 군비 확장을 실시하여 황제의 독재권을 강화하였으며, 서유럽 문화의 수입에 노력했다. 그러나 그 여러 개혁은 위로부터의 개혁이어서 사회의 진정한 근대화에는 미치지 못했고 서유럽화도 일반인에게는 관계없었으며, 농노제가 유지 강화되었다. 대외적으로는 투르크로부터 아조프해 주변을 빼앗고, 다시 서쪽으로는 스웨덴과 북방전쟁을 벌여 발트해에의 출구를 확보하고, 이곳에 [[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하여 수도로 삼았다.
 
표트르 1세의 사업, 특히 서유럽화의 정책은 보수파의 반항을 야기시켰고, 황제의 사후 이 항쟁은 궁정을 중심으로 정권쟁탈과 결부, 반복되어 [[예카테리나 2세]](카자린 2세)에 이르기까지 약 40년간 계속되어 러시아를 혼란시켰다. 18세기 후반 이 혼란기 후에 즉위한 예카테리나 2세는 표트르 1세의 사업을 이어받아 계몽적 전제정치를 펴서 여러 가지 개혁을 실시했다. 그러나 농노제는 오히려 강화되어 농민의 대봉기 [[푸가초프의 난]]이 일어났다. 예카테리나 2세는 대외정책에도 주력하여 두 차례에 걸친 터키와의 전쟁으로 [[드네프르 강|드네프르강]] 하구(河口) 지방과 [[크림 반도]]를 병합하고 [[흑해(黑海)]] 진출의 기초를 구축했다. 또한 오스트리아·프로이센과 함께 3회에 걸쳐서 폴란드를 분할하고 서쪽으로도 영토를 확대시켰다. 동쪽으로는 시베리아 전토가 이미 러시아 영토가 되어 있었으나, 다시 극동해상(海上)에[[극동]] 해상에 진출하고 락크스맨을 일본에 파견하여 통상을 요구했다. 이리하여 러시아는 18세기 말 강국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하고 이후의 유럽 국제관계에 커다란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 북유럽 왕국 쇠퇴 ====
북유럽의 시장은 옛날부터 유럽 제국의 경제 활동의 중요한 무대였는데, 북아메리카·아프리카·동양 등의 원격지(遠隔地) 무역이 발전함에 따라 상대적으로 그 지위가 저하되었다. 더욱이 러시아, 프로이센 등의 새로운 강국이 대두하여 발트해에 진출하기 시작하자 북유럽 제국의 입장은 차차 곤란해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나라들은 제1차 산업을 중심으로 하고 있어, 시민계급의 성장이 충분하지 못하고, 따라서 근대적인 통일국가의 출현이 지연되었다는 것이 한층 곤란을 증가시키고 있었다.
 
==== 이탈리아 ====
르네상스로 근대의 물결 위에 선 이탈리아도 경제활동의 중심지가 이동함에 따라 여러 도시의 상공업이 쇠퇴하고, 봉건적 반동은 18세기까지 계속되었다. 이탈리아의 분열은 제후(諸侯)들의제후들의 항쟁에 의해서 한층 격화되었고, 주변 여러 강대국의 이탈리아 지배를 노린 침략은 극히 노골적이어서, 대국의 싸움은 때때로 이탈리아를 무대로 하였다. 에스파냐의 계승전쟁(繼承戰爭) 때,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군과 프랑스, 에스파냐군의 결전장이 되어 대단한 전화(戰禍)를전화를 입었다. 국내는 소왕국·소공국(小公國)·공화국으로 분열되어, 국가적 통일의 기운(氣運)은기운은 보이지 않았다. 18세기에 이르러서도 국내에 별다른 산업이 일어나지 않았고, 수공업적인 사치품 생산이 일반적이었다. 북이탈리아의 밀라노를 중심으로 한 지방은 예외였다. 이 지방에서는 집약적(集約的) 농업이 실시되었고, 밀라노는 상인이 지배하여 활기를 보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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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산업 혁명}}
[[파일:Maquina vapor Watt ETSIIM.jpg|thumb|220px|left|[[와트 증기 기관]]. 이 [[증기 기관]]은 [[영국]]과 세계의 산업 혁명을 촉진하였다.]]
산업혁명(Industrial Revolution)은 단순한 생산기술의 혁신에 의해서 발생한 생산성의 비약적 증대가 아니라 공장제 수공업(매뉴팩처)에서 기계제 대공장(팩트리)을 출현시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확립한 진정한 변혁이다. 이 생산상의 혁명이 최초로 영국에서 실현된 데에는 몇 가지 원인이 있다. 우선 영국에 있어서는 봉건적인 여러 관계가 재빨리 해체되고, 타국에 비해서 유리한 조건으로 상공업의 발전이 있었다는 것, 특히 [[양모]] 공업이 국민적 규모로 전개되어 있었다는 것이 지적된다. 나아가 시민혁명을 통해서 자본주의의 발전을 저지하는 등 제도상의 여러 장해가 대체로 제거되었다는 것도 중요한 원인이다. 또한 17, 18세기에 있어서 국내산업의 보호와 적극적인 무역정책은 중상주의적 식민지정책을식민지 정책을 기축(基軸)으로 실시되어, 국내에 자본축적을 가져오게 했다. 영국 본토·아프리카·북아메리카·서인도 제도·인도·중국을 연결하는 복잡한 무역망이 조직되어, 열대·아열대의 생산물에 대한 수출품으로서 면제품(綿製品)이면제품이 중요시되기에 이르렀다.
 
면제품은 생산고를 비약적으로 증대시켜, 19세기 초두 국민소득면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제1위가 되었다. 이 면직물 공업의 발전은 그에 관련된 산업 부문에 계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철·기계·석탄의 수요 증대, 저렴한 수송수단의 필요성, 이와 같은 형태로 산업 전체가 자극을 받았다. 영국은 19세기 초두에는 [[선철]]의 생산량과 출탄량에 있어서 세계 제1위를 차지하여, 증기기관이나 직기(織機)에서 볼 수 있는 기계공업의 눈부신 기술을 자랑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진실로 ‘세계의 공장’이라는 이름에 부합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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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미국 독립 전쟁}}
 
[[7년 전쟁]]이 종결되자, 종래의 식민지와 영국 본국과의 유대에도 변화가 생기고, 식민지 경제의 발달은 전후 영국 본토의 [[중상주의(重商主義)]] 지배에 대한 반발을 낳았다. 영국 본국은 7년전쟁에 지출한 막대한 전비를 식민지에 부담시키려고 중상주의 정책의 강화를 기도하여, 일련의 과세·규제 정책이 취해졌다. 이러한 본국의 식민지 정책은 실제로는 식민지 경제에 지나친 피해를 미친 것은 아니었으나, 영국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요구하는 식민지 주민에게는 불만과 반감을 야기시켰다. 1765년의 버지니아 결의, 1768년의 매사추세츠 회장 등에 나타나 있듯이 식민지 의회의 승인을 강조하여 “대표 없는 곳에 과세 없다”는 사상이 퍼져 있었다.
 
1773년 [[보스턴 차 사건]]을 계기로 본국은 소위 ‘견딜 수 없는 제법(諸法)’에 의해서 보스턴 시민에 대해 징벌적 태도로 임하였다. 더욱이 [[퀘벡법]](Quebec Act)의 제정은 식민지인 전체에 중대한 충격을 주어, 1774년 [[대륙회의]]는 본국 정부의 완화를 요청했는데, 급진파의 움직임은 활발해져 렉싱턴에서 [[미국 독립 전쟁|전쟁]]에 돌입했다. 독립운동에 참가한 애국파에는 대상인·농원주 등의 온건파와, 밀무역상인·자영농·기술자를 중심으로 하는 급진파가 있어, 차차 후자가 혁명의 지도권을 장악하였고, 독립선언으로부터 연합규약에 의한 국가연합으로 이끌어갔다. 혁명이 최종 단계에 들어가자 보수파에 지도권이 옮겨지고, 헌법 제정에 의한 연방 정부의 수립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