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종파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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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 [[김일성]]은 항일유격대인 [[동북항일연군]] 출신으로 [[만주파 (조선로동당)|만주파]]의 수장이었다. 만주파에서 [[김책]]과 [[최용건]], [[최현]], [[김일]] 등을 제외한 인물들은 다른 계파에 비하여 교육수준이 낮고 국가적 당사업 및 정치적 경험이 없었다. 이에 비해 국내파 중에서도 핵심이었던 [[남조선로동당]] 출신의 [[남조선로동당|남로당파]]의 수장 [[박헌영]]은 1925년 [[조선공산당]]을 창당한 조선 공산주의 운동의 중심이었고,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이론에 대해 한반도에서 따라올 자가 없는 사상가였다. 게다가 한반도 밖이 아닌 안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정치적 명분도 쥐고 있어, 당대 좌파 운동가들이 꿈꾸던 사회주의조선의 지도자로 가장 큰 지지를 받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은 소련의 말을 잘 듣는 인물을 [[위성국가]]의 수장으로 삼았는데, 4개 계파 중 소련과 가장 친한 것은 소련 영토에서 활동만 했던 소련파가 아니라 소련군과 직접적으로 연줄이 있었던 만주파였다. 그 결과 김일성이 중국, 소련, 미국과도 두루 친하게 지내던 박헌영을 제치고 북한의 수상으로 선택되었다. 박헌영과 그의 지지자들 입장에서는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쳐내는 격이었다.
 
소련을 등에 업고 수상이 된 김일성과 박헌영의 갈등은 필연적이었고, 이 갈등은 [[한국 전쟁|한국전쟁]]의 [[인천 상륙 작전|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전세가 크게 역전되며 극대화되었다. 김일성은 승전 실패의 책임을 지고 수상 자리에서 축출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크게 두려워했는데, 이 책임을 "전쟁이 시작되면 남한의 20만 남로당원이 봉기해서 인민군의 진격을 도울 것"이라며 빨치산론을 주장했던 박헌영에게 몰았다. 1953년 3월, 김일성은 박헌영에게 전승 실패의 책임과 더불어, 해방 후 미국 대사와 몇 차례 만난 적이 있다는 구실로 '미제 스파이'라는 명분을 만들어 체포했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6/24/2010062400087.html|제목=[2010, 인물로 다시 보는 6·25] "이 자식아, 전쟁지면 너도 책임있어" 김일성, 박헌영에 잉크병 집어 던져|성=이지수|이름=|날짜=기사입력 : 2010.06.24 최종수정 : 2010.06.24|뉴스=|출판사=조선일보|확인날짜=2018.04.19}}</ref> 또한 연안파의 거두였던 [[무정]]을 평양 방어 실패의 책임을 물어 숙청했다. 전후 김일성은 박헌영이 속했던 국내파를 대거 축출했고, 김일성을 필두로 한 만주파의 권력은 날로 커져갔다.
 
전후 김일성은무렵 박헌영이전후복구와 속했던 국내파를 대거 축출했고, 만주파의 권력은 날로 커져갔다. 이 무렵관련해 김일성은 강경하게 중공업 우선의 경제정책을 주장했고, 연안파, 소련파 등은 경공업 우선의 경제정책을 주장하며 갈등을 빚고 있었다. 연안파, 소련파 등은 이전부터 김일성이 권력을 좌지우지하는 상황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러던 1955년 12월, 체포되어 재판을 받던 박헌영에게 끝내 사형이 선고되며 북한의 지도부 사이에서는 김일성에게 당하기만 해서는 안된다는 위기의식이 대두되었다. 다만 1945년 광복 후 남북 각각의 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의 해방공간에서 공산주의자들이 미국의 인사와 접촉하는 일은 흔한 일이라 증거로서의 효력이 불충분했고, 소련과 중국에도 박헌영 지지자들이 많았으므로, 김일성은 박헌영을 실제로 사형시키지는 못했다.
 
=== 국제적 배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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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개 ==
1956년 4월, 스탈린 격하 운동 1개월 후에 소련파 및 연안파는 [[조선로동당 제3차 대회|조선로동당 제3차 당대회]]에서 김일성에게 개인숭배에 대한 자기비판을 요구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를 사전에 눈치챈 김일성은 개인숭배 또한 박헌영이 조장한 것이라고 둘러대며 이를 사전에 차단했다. 이에 소련공산당은 동 당대회를 정식 대회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김일성을 압박하며 소련파에 힘을 실어주었다.
 
1956년 8월, [[김일성]]이 동유럽 공산권 국가로 순방을 나가 있는 동안 북한에서는 평양예술극장에서 전원회의가 예정되어 있었다. [[연안파]]에 속하던 부주석 [[최창익]]을 비롯한 세력은 이 회의에서 김일성을 공개적으로 비판하여, 주석직에서 물러나게 하려했다. 아직 김일성 유일지배체계가 갖춰지기 이전, 조선로동당의 공개적인 회의에서 김일성을 비판하면 그 파급력은 무시할 수 없었다없었고, 이를 토대로 당의 민주적 집단지도체계를 확립하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이 소식은 [[최용건]]([[최룡해]]의 아버지)을 비롯한 만주파의 귀에 들어간 상태였다.
 
{{인용문 | 윤공흠이 연설할 계획이 있었습니다. '김일성에게 개인숭배가 있고 탄압정책이고 숱한 간부들을 청산했고... 우리 당에 이런 것이 있다'라고 얘기할 참이었습니다. 나도 내무성 정치국장으로서 중앙당 준비회의에 참가해서 내 눈으로 보고 들었는데, 어떻게 준비했느냐 하면, '만일에 연안파가 나와서 토론하게 되면 막 발을 구르고 손뼉 쳐서 말을 못하게 하라, 내려오라 내려오라 하자'라고 준비를 했어요. 실제로 윤공흠이 연설할 때 막 일어서고 '반당종파분자를 몰아내라' 하니까 윤공흠이 말을 못하고 내려왔지.|강상호, 전 북한 내무성 부장}}
 
전원회의 당일, 연안파 윤공흠이 단상에 올라가 김일성을김일성 비판하려비판을 하자시작하자, 회의장 수많은 곳에서 "종파 분자는 내려오라"고 격렬하게 항의했다. 특히 이들은 [[최용건서휘]]([[최룡해]]의 아버지)당시 연안파가 최용건 등 조선노동당 내에서 명망이 높았던 인물들도 비판할 계획이계획을 갖고 있었는데, 이에 대해 조선로동당 핵심 간부들의 불만이 컸다고컸던 점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 실수였다고 한다회고했다.
 
김일성이크게 이 소식을 듣고 크게분노한 분노하여김일성은 곧장빠르게 귀국하였다.귀국하였고, 박창옥, 최창익, 서휘, 윤공흠 등 반김일성 운동을 주도했던 세력은 모두 직책을 박탈당하고 당에서 쫓겨나는 등의 방법으로 숙청되었다. 이는 북한 60년 역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김일성의 절대 권력에 도전했던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ref>박유리.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2288243 1958년 북한 모스크바 유학생 ‘집단 망명’ 사건, 그 후…]. 한겨레. 기사입력 2015년 9월 5일. 최종수정 2015년 9월 25일.</ref>
 
== 결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