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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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발표에 따라 [[3월 2일]] 오전 10시를 기해 타이베이, 까오슝 등 대만 전역에서 국민당 정부의 핵심 인사들이 참여하는 한편, 군중 대표들도 참가한 '2·28사건처리위원회(二二八事件處理委員會)'가 구성되었다. 담배 전매 폐지와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요구하면서 성명서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무차별 발포를 한 군·경을 대신하여 학생과 청년들로 조직된 치안 봉사대가 치안을 유지하고 처리위원회의 공정한 조사가 진행되면서, [[3월 4일]] 이후 사태는 서서히 진정 국면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특히, 처리위원회에 대한 대만 주민들의 지지가 더해지면서 그 권위가 높아지자, 처리위원회는 2·28 사건에 대한 수습을 넘어 민중 분노의 근본 원인은 [[중국 국민당|국민당]] 정부의 무능함에 있으며 이것을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근본적인 정치개혁을 요구하면서 이를 대만의[[타이완|대만]]의 자치와 인권보장을 요구하는 '32개조 요구'로 구체화시켰다. 천이는 처리위원회에서 협상하여 개혁요구를 수용한다고 밝혔으며, 경찰의 발포를 금지시키는 대신 군중도 집회를 해산할 것을 요구했다.
 
=== 진압과 학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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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이후 40년 동안 대만에서 2·28 사건은 언급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최대의 금기였다. [[국공 내전|국공내전]]에서 패퇴한 [[중국 국민당]]은 [[1949년]] 12월에 중화민국 정부를 [[타이베이 시|타이베이]]로 옮겨왔다.([[국부천대]]) 그러나, 이미 내전의 패색이 짙던 [[1949년]] [[5월 1일]] 대만 섬 전체에 걸쳐 총호구 조사를 실시하였으며, 같은 달 21일에는 [[계엄령]]을 발표하였다. 그 해 말부터 위험 분자로 간주된 이들이 대거 체포됐다. '대만을 보위하고 대륙(중국 대륙)을 공격한다'(反攻大陸)는 총 구호하에서 내전을 반대하거나 국공 평화 회담을 주장하거나 평화 건설과 민생 문제를 개선하라고 요구하는 사람이나 언론은 무조건 중국 공산당의 간첩, 파괴 분자, 음모 분자로 간주되었다.
 
1949년 5월 21일 대만 전역에 발포된 계엄령은 38년 동안 계속되다가 [[1987년]] [[7월 15일]]이 되어서야 [[장징궈]](蔣經國) 총통의 명령으로 해제되었다. 계엄령이 지속되면서 금기 중의 금기가 되어버린 이 사건은, 계엄이 해제된 후 대만 독립운동가 정난롱(鄭南榕)이 1987년 2·28사건 40주년을 기념해 대만 역사상 최초로 2·28사건을 연구하는 ‘2·28평화일촉진회(二二八和平日促進會)’를 결성하며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2·28사건은 대만의 독립주의 정당인 [[민주진보당]]에서 지속적으로 공론화했으며, [[1988년]] 본성인 출신 국민당원 [[리덩후이]](李登輝)가 총통에 취임하면서 본격적으로 언급되기 시작했다. 2·28사건 당시 구속된 경험도 있었던 [[리덩후이]] 총통은 [[1995년]] 국가차원에서는 최초로 희생자 가족에게 사과하였으며, 같은이듬해인 행사에서[[1996년]] 2·28사건 당일 민중이 최초로 모였던 [[얼얼바 평화기념공원|타이베이신공원]](臺北新公園; 당시의 중산공원)은 [[얼얼바 평화기념공원|2·28평화기념공원]](二二八和平紀念公園)으로 개칭되었다. 사건 발생 50주년인 [[1997년]]에는 [[중화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사죄하였다.
 
아직도 2·28 사건 사망자의 정확한 숫자는 알 수가 없다. [[1991년]] [[리덩후이]] 총통의 지시로, 이듬해 [[행정원]]이 발표한 「2·28 사건 연구 보고」에 따르면 2·28 사건으로 희생된 사람의 수는 3만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