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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eonggyungwan quad2.jpg|thumb|150px|left|성균관 경내]]
 
[[1370년]]1367년 [[성균관]]을 중영하고 그해 [[이색|목은 이색]]이 [[대사성]]이 되자, [[1370년]] 그는 박상충 박의중 김구용 등 [[벗]]들의 천거로 [[성균관박사]]가 되었다. [[성균관]]의 박사로 있으면서 [[정몽주|포은 정몽주]] 등 교관과 매일같이 [[명륜당]]에서 [[성리학]]을 수업, 강론하였다. 다시 [[예조]][[정랑]] 겸 성균·태상박사(禮曹正郞兼成均太常博士)가 되어 전선(銓選)을 관장하였다.[[1371년]] [[태상박사]]에 임명되고, 다시 [[예의]]정랑이 되어 [[태상박사]]를 겸임했다. 신돈의 무모한 전횡에 정치일선에서 물러나 잠시 삼각산 옛집으로 낙향하였다가, [[신돈]]이 제거된 뒤에 정도전은 등용되었다.
 
[[1374년]]([[공민왕]] 24) 환관 최만생과 [[홍륜]] 등에게 [[공민왕]]이 살해되면서 [[친명파]]에 속했던 정도전은 다시 정치적 위기를 겪었다. 그때 정국은 [[친원파]](親元派)와 [[친명파]](親明派)가 대결하고 있었다.<ref name="소비자" /> 이때 그는 [[성균관]]에서 [[성리학]]을 강학하면서 한편으로는 [[정몽주]] 등과 함께 [[명나라]]와의 [[외교관계]]를 돈독히 할 것을 주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