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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종교와 독립운동 ==
나철은 비밀 결사 조직인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여 [[을사오적]]으로 알려진 [[이완용]], [[권중현]],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의 다섯 인물의 [[암살]]을 시도했다. 또한 그들을 죽이자는 참간장(斬奸狀)을 돌리기도 했으며, 일본을 방문해 [[고쿄|일본 궁성]] 앞에서 단식투쟁을 하기도 하였다. 대종교 중광 60년사에 따르면 나철은 이 사건 때문에 정부 전복 혐의로 무안군 지도(智島)에 유배되기도 했는데, 1909년 정월 15일 자시(子時: 밤 11시~새벽 1시) 서울 북부 재동(齋洞) 취운정(翠雲亭) 아래에서 60여 명의 동지들과 단군교를 새롭게 열면서 이날을 중광절(重光節)로 삼았다. 중광이란 기존에 있던 것을 새롭게 중흥한다는 의미였다. 망국이 눈앞에 있었기 때문에 위기를 느낀 사람들이 단군교에 속속 입교했지만 서울 북부지사교(北部支司敎) 정훈모가 친일로 돌아서고 일제의 탄압이 가해지자 나철은 [[1910년]] [[8월]] 교명을 대종교로 바꾸었다.<ref>[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24785 홍범도 대한독립군] 망국 10년 만에 국내 진공작전 포문, 중앙SUNDAY(2012.02.05) 기사 참조</ref>
 
[[1919년]] 상해 임시정부가 발족하면서 임시의정원 의원 35명 가운데 28명이 대종교 교도였다. 독립전쟁사에 기록된 봉오동, 청산리 대첩의 실질적인 지휘부는 대종교였다고 한다. [[이상설]], [[김좌진]], [[홍범도]], [[박은식]], [[김규식]], [[신채호]], 이상용, 김동삼, 이범석 등 애국지사들이 그들이었다. [[한국전쟁]] 때 납북된 정인보를 비롯해 [[김두봉]], 이극로 등도 대종교인이었다. 김두봉은 [[1916년]] [[구월산]]에서 [[나철]]이 순교할 때 시봉하기도 했다.
 
환국 직후에도 대종교는 번성했다. 50년대 후반 교도 수가 60만 명을 넘어섰고, [[삼일신고]], [[천부경]], [[참전계경]] 등 경전과 [[규원사화]], [[환단고기]] 등 역사서를 보급시켰다. 환국 이후 대종교는 민족 종교의 적통으로 인정받아 초대 정부의 제1 교단으로 등록되었다. 당시 대종교의 지식인들이 정부의 고위관리로 입각해 활동했다. 안호상 초대 문교부 장관 등이 중심이 되어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확립했다. 교육이념에 홍익인간이 채택되었고 단군 연호, 개천절, 한글 전용 등이 시행되었다. 올해가 단기로는 4474년이다.
 
민간에서는 대종교 중심으로 민족 행사들이 개최되었다. [[1946년]] 광복 1주년 당시엔 대종교 총본사에서 채화된 성화가 남산 꼭대기에 점화되었다. 그해 [[개천절]] 행사에선 성화가 총본사에서 채화되어 [[마니산]] [[참성단]]까지 봉송, 점화되었다. [[홍익대]], [[단국대]], [[경희대]] 등은 대종교 교인에 의해 설립된 대학이다. 이렇듯이 대종교 역사 자체가 독립운동사였다. <ref>{{뉴스 인용|url=http://www.segye.com/newsView/20170815001496|제목=치열했던 항일투쟁 뒤에 민족종교 있었다|성명=정승욱 선임기자|날짜=2017-08-16|출판사=세계일보|확인일자=2018-04-26}}</ref> <ref>{{뉴스 인용|url=http://news.donga.com/3/all/20180331/89390898/1|제목=‘肉彈血戰’ 외친 의군부 독립선언서, 抗日무력투쟁 불 댕겨|성명=안영배 기자|날짜=2018-04-09|출판사=동아일보|확인일자=2018-04-26}}</ref> <ref>{{뉴스 인용|url=http://www.hankookilbo.com/v/0a301e081add4865acd452d19638062b|제목=독립운동 대부 ‘나철’ 애국혼 기린다|성명=하태민 기자|날짜=2016-10-31|출판사=한국일보|확인일자=2018-04-26}}</ref>
 
== 정훈모의 단군교 ==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나철이[[나철]]이 교명을 대종교로 바꾸고 만주로 교단을 이동하자 정훈모가 이에 반발하여 단군교라는 교명을 고수하며 교단을 분리·독립하였다. [[나철]]이 교명을 바꿔 만주로 이동하게 된 계기가 정훈모를 중심으로 한 몇몇 친일분자들에 의한 교단 내분이었다.<ref>「한국종교사상사」, 대종교 창건사, 김홍철 저 연세대학교출판부(1998년, 145P ~148P 내용참조)</ref> 정훈모의 단군교는 [[단군]]을 신봉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통치에 순응하였으며, 교단의 수뇌부에는 [[친일인명사전]]에도 수록된 [[친일파]]가 있었다. <ref>단군교부흥경략(檀君敎復興經略), 1책 82장, 신연활자본, 김재웅(金在雄) 교열, 정진홍(鄭鎭洪) 편집(1937년) 참조</ref> [[1912년]]에 내분이 일어나 교단이 둘로 나뉘었으나 1915년 정훈모가 교단을 재정비하였으며, 1930년에는 시흥에 단군전(檀君殿)을 세우고 본부를 이전하였다. 이후 내분이 이어지고 일제가 소수 종교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자 1936년에 폐교되고 신자들도 와해되었다.<ref>「한국종교사상사」, 대종교 창건사, 김홍철 저 연세대학교출판부(1998년, 119P ~139P 내용참조)</ref> <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3540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단군교] “[[1912년]] 이유형·서창보의 사리사욕 행위에 대한 시교사(施敎師)들의 비판과 교인들끼리의 주도권 쟁탈로 교단에 내분이 일어나자 정훈모는 [[1915년]]에 양분된 교단을 재정비하고 [[1930년]] 교당인 단군전(檀君殿)을 시흥에 세워 본부를 이전, 본부와 지부의 조직을 강화, 교전(敎典)을 간행하는 등 활발한 포교활동을 벌였지만 곧 자금문제로 신도들이 교주를 고발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일제의 무관심과 압력이 가해지자 시흥의 본부가 폐쇄되고, 정훈모가 사망하면서 각 지부는 독자적인 행동에 단군교는 와해로 소멸되었다.”</ref>
 
== 경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