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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상해 임시정부가 발족하면서 임시의정원 의원 35명 가운데 28명이 대종교 교도였다. 독립전쟁사에 기록된 봉오동, 청산리 대첩의 실질적인 지휘부는 대종교였다고 한다. [[이상설]], [[김좌진]], [[홍범도]], [[박은식]], [[김규식]], [[신채호]], 이상용, 김동삼, 이범석 등 애국지사들이 그들이었다. [[한국전쟁]] 때 납북된 정인보를 비롯해 [[김두봉]], 이극로 등도 대종교인이었다. 김두봉은 [[1916년]] [[구월산]]에서 [[나철]]이 순교할 때 시봉하기도 했다.
 
환국 직후에도 대종교는 번성했다. 50년대 후반 교도 수가 60만 명을 넘어섰고, [[삼일신고]], [[천부경]], [[참전계경]] 등 경전과 [[규원사화]], [[환단고기]] 등 역사서를 보급시켰다. 환국 이후 대종교는 민족 종교의 적통으로 인정받아 초대 정부의 제1 교단으로 등록되었다. 당시 대종교의 지식인들이 정부의 고위관리로 입각해 활동했다. [[안호상]] 초대 문교부 장관 등이 중심이 되어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확립했다. 교육이념에 [[홍익인간]]이 채택되었고 단군 연호, 개천절, 한글 전용 등이 시행되었다.
 
민간에서는 대종교 중심으로 민족 행사들이 개최되었다. [[1946년]] 광복 1주년 당시엔 대종교 총본사에서 채화된 성화가 남산 꼭대기에 점화되었다. 그해 [[개천절]] 행사에선 성화가 총본사에서 채화되어 [[마니산]] [[참성단]]까지 봉송, 점화되었다. [[홍익대]], [[단국대]], [[경희대]] 등은 대종교 교인에 의해 설립된 대학이다. 이렇듯이 대종교 역사 자체가 독립운동사였다. <ref>{{뉴스 인용|url=http://www.segye.com/newsView/20170815001496|제목=치열했던 항일투쟁 뒤에 민족종교 있었다|성명=정승욱 선임기자|날짜=2017-08-16|출판사=세계일보|확인일자=2018-04-26}}</ref> <ref>{{뉴스 인용|url=http://news.donga.com/3/all/20180331/89390898/1|제목=‘肉彈血戰’ 외친 의군부 독립선언서, 抗日무력투쟁 불 댕겨|성명=안영배 기자|날짜=2018-04-09|출판사=동아일보|확인일자=2018-04-26}}</ref> <ref>{{뉴스 인용|url=http://www.hankookilbo.com/v/0a301e081add4865acd452d19638062b|제목=독립운동 대부 ‘나철’ 애국혼 기린다|성명=하태민 기자|날짜=2016-10-31|출판사=한국일보|확인일자=2018-04-26}}</ref>
 
== 정훈모의 단군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