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득: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6번째 줄: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언군]] 이인의 서자로 태어났으며 [[상계군]] 이담, [[이창순]], [[이창덕]]의 이복 동생이며 [[풍계군]] 이당의 이복 형이었다. 그의 생모가 성득의 생모와 동일인인지 [[전산군부인 이씨]]인지 여부는 불분명하다. [[조선 정조|정조]]에게는 서조카가 된다 그는 한성부에서 태어났지만 [[홍국영]]이 [[상계군]]을 [[조선 정조|정조]]의 양자로 추대하려던 사건으로 역적으로 몰리면서, 가족을 따라 [[강화도]]로 가서 성장하였다.
 
그는 [[은언군]]의 아들이었으나 왕족으로 예우받지 못했다. 그에 관련된 기록은 대부분 철종, 고종 때 삭제되어서 알 수 없다. 한때 그의 이름이 [[상계군]] 담의 아명으로 추정되었으나 [[상계군]]은 [[1786년]] 의문의 독살은 당했고 그의 이름은 [[1801년]](순조 1) 이후의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기사에 등장한다. [[비변사등록]]의 [[1812년]] [[2월]] [[강화부]]로 파견된 금부도사 심노숭(沈魯崇)이 조정에 보고한 보고서에 의하연 그는 당시 만32세였으며, 당시 미혼이었다 한다. 한때 그는 [[풍계군]]과도 동일인물로도 추정되었으나 [[풍계군]]은 선원록 선원보략에 의하면 [[1783년생]] 이라 한다.
 
[[비변사등록]]의 [[1812년]] [[2월]] [[강화부]]로 파견된 금부도사 심노숭(沈魯崇)이 조정에 보고한 보고서에 의하연 그는 당시 만32세였으며, 당시 미혼이었다 한다. 한때 그는 [[풍계군]]과도 동일인물로도 추정되었으나 [[풍계군]]은 선원록 선원보략에 의하면 [[1783년생]] 이라 한다.
 
[[1801년]](순조 1) [[3월]] 적모 [[상산군부인 송씨]]와 적형수 [[평산군부인 신씨 (상계군)|평산군부인 신씨]]가 [[천주교]]에 귀의한 일로 사사당한 뒤 아버지 [[은언군]] 이인도 [[5월 29일]] 사사령을 받고 [[6월 30일]] 사사되었다. 그는 [[천극죄인]]의 신분이 되어 형제인 [[이성득 (조선 왕족)|이성득]], [[풍계군|이당]], [[전계대원군|이광]] 등과 함께 [[강화도]]의 한 민가에 감금되었다.
 
[[1805년]] [[8월 27일]] [[강화도]]에 이철득, 이성득, 이쾌득이 감금당한 집에 불이 나 [[강화부]]유수 오재소(吳載紹)가 조정에 장계를 올려 보고하였다.<ref>승정원일기 1898권 1805년(순조 5년, 청 가경 10년) 8월 29일 기유 19번째 기사</ref> [[1817년]](순조 17) [[11월 30일]] 형 [[이성득]]이 형문을 받다가 고문치사하면서 [[조선 순조|순조]]는 은언군의 자녀들을 석방하려했다. [[조선 순조|순조]]는 특별 명령을 내려 이철득과 이쾌득을 임시로 풀어주었다.<ref>"승정원에서 의계하여 죄인을 옮기면 안된다고 하였으나, 듣지 않다", 순조실록 20권, 1817년(순조 17년, 청 가경 22년) 11월 30일 기사 2번째기사</ref> 이후의 행적은 미상이다.
 
[[전산군부인 이씨]]의 묘비문에 의하면 전산군부인 이씨가 낳은 첫 아들은 요절하였다 하며<ref>전계군의 친형, 김포시 통진면 마송리 전산군부인 이씨 묘비문</ref>, 그가 [[이성득]]의 동복 친동생인지 혹은 [[전계대원군]]의 동복 친형인지 여부는 불분명하다. 1812년1817년 무렵까지는 생존해 있었는데 덩시까지도 그는 미혼이었다. [[1813년1817년]] 이후로 기록이 등장하지 않는다. 사망 장소와 사망 원인은 미상이며 묘소의 위치도 미상이다.
 
자녀를 남기지 못했고 일찍 사망하여 철종 즉위 후에도 조명받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