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득: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4번째 줄:
 
== 생애==
[[1780년]](정조 4)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언군]] 이인의 서자로 태어났으며태어났으나, 정확한 생년월일은 미상이다. 그의 존재는 오랫동안 잊혀졌다가 [[1970년]]대 이후 [[대한민국 정부]] 주도로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일성록 등을 국역하는 과정에서 알려지게 되었다. [[상계군]] 이담, [[이창순]], [[이창덕]]의 이복 동생이며 [[풍계군]] 이당의 이복 형이었다. 그의 생모가 성득의 생모와 동일인인지 [[전산군부인 이씨]]인지 여부는 불분명하다. [[조선 정조|정조]]에게는 서조카가 된다 그는 한성부에서 태어났지만 [[홍국영]]이 [[상계군]]을 [[조선 정조|정조]]의 양자로 만든 뒤 세자로 추대하려 했으나 당시 정조는 20대의 나이로 충분히 다른 여성을 임신시킬 수 있었다.
 
[[홍국영]]이 [[상계군]]을 세자로 추대하려 한 일로 아버지 [[은언군]]도 삭탈당하고 역적으로 몰리면서, 가족을 따라 [[강화도]]로 가서 성장하였다.
 
그는 [[은언군]]의 아들이었으나 왕족으로 예우받지 못했다. 그에 관련된 기록은 대부분 철종, 고종 때 삭제되어서 알 수 없다. 한때 그의 이름이 [[상계군]] 담의이담의 어릴 적 아명으로 추정되었으나 [[상계군]]은 [[1786년]] 의문의 독살은 당했고, 그의 이름은 [[1801년]](순조 1) 이후의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기사에 등장한다. [[비변사등록]]의 [[1812년]] [[2월]] [[강화부]]로 파견된 금부도사 심노숭(沈魯崇)이 조정에 보고한 보고서에 의하연 그는 당시 만32세였으며, 당시 미혼이었다 한다. 한때 그는 [[풍계군]]과도 동일인물로도 추정되었으나 [[풍계군]]은 선원록 선원보략에 의하면 [[1783년생]] 이라 한다.
 
[[1801년]](순조 1) [[3월]] 적모 [[상산군부인 송씨]]와 적형수 [[평산군부인 신씨 (상계군)|평산군부인 신씨]]가 [[천주교]]에 귀의한 일로 사사당한 뒤 천극죄인 신분이 되어 집에 가시울타리가 쳐졌다. 그해 [[5월 27일]] 새벽 3~4시 경 이철득은 아버지 [[은언군]] 이인과 함께 가시덤불을 뚫고 강화도에서 탈출하려다가 강화와 김포의 경계에서 병졸에게 적발, 체포되고, 강화 유수 황승원(黃昇源)의 탄핵을 받았다.<ref>순조실록 3권, 1801년(순조 1년, 청 가경 6년) 5월 28일 계묘 4번째기사, "황승원이 은원군과 그 아들 철득이 달아나다 잡힌 일을 장계하다"</ref> 아버지 [[은언군]] 이인도 [[5월 29일]] 사사령을 받고 [[6월 30일]] 사사되었다. 그는 [[천극죄인]]의 신분이 되어 형제인 [[이성득 (조선 왕족)|이성득]], [[풍계군|이당]], [[전계대원군|이광]] 등과 함께 [[강화도]]의 한 민가에 감금되었다. 그는 다른 형제들 성득, 이당, 쾌득(해동) 등과 같이 유배지에서 지속적으로 감시를 받았다.
 
아버지 [[은언군]] 이인도 [[5월 29일]] 사사령을 받고 [[6월 30일]] 사사되었다. 그는 [[천극죄인]]의 신분이 되어 형제인 [[이성득 (조선 왕족)|이성득]], [[풍계군|이당]], [[전계대원군|이광]] 등과 함께 [[강화도]]의 한 민가에 감금되었다. 그는 다른 형제들 성득, 이당, 쾌득(해동) 등과 같이 유배지에서 지속적으로 감시를 받았다.
 
[[1805년]] [[8월 27일]] [[강화도]]에 이철득, 이성득, 이쾌득이 감금당한 집에 불이 나 [[강화부]]유수 오재소(吳載紹)가 조정에 장계를 올려 보고하였다.<ref>승정원일기 1898권 1805년(순조 5년, 청 가경 10년) 8월 29일 기유 19번째 기사</ref> [[1812년]](순조 12) [[2월 24일]] [[강원도]][[관찰사]] 이호민(李好敏)의 비밀 계획에 의해 [[강화도]]로 파견된 [[의금부|금부]][[도사]]의 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그는 얼굴이 철색이고 구레나룻이 짧고 다소 비대하였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