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득: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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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1780년]](정조 4)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언군]] 이인의 서자로
[[홍국영]]이 [[상계군]]을 세자로 추대하려 한 일로 아버지 [[은언군]]도 삭탈당하고 역적으로 몰리면서, 가족을 따라 [[강화도]]로 가서 성장하였다.
그는 [[은언군]]의 아들이었으나 왕족으로 예우받지 못했다. 그에 관련된 기록은 대부분 철종, 고종 때 삭제되어서 알 수 없다. 한때 그의 이름이 [[상계군]]
[[1801년]](순조 1) [[3월]] 적모 [[상산군부인 송씨]]와 적형수 [[평산군부인 신씨 (상계군)|평산군부인 신씨]]가 [[천주교]]에 귀의한 일로 사사당한 뒤 천극죄인 신분이 되어 집에 가시울타리가 쳐졌다. 그해 [[5월 27일]] 새벽 3~4시 경 이철득은 아버지 [[은언군]] 이인과 함께 가시덤불을 뚫고 강화도에서 탈출하려다가 강화와 김포의 경계에서 병졸에게 적발, 체포되고, 강화 유수 황승원(黃昇源)의 탄핵을 받았다.<ref>순조실록 3권, 1801년(순조 1년, 청 가경 6년) 5월 28일 계묘 4번째기사, "황승원이 은원군과 그 아들 철득이 달아나다 잡힌 일을 장계하다"</ref> 아버지 [[은언군]] 이인도 [[5월 29일]] 사사령을 받고 [[6월 30일]] 사사되었다. 그는 [[천극죄인]]의 신분이 되어 형제인 [[이성득 (조선 왕족)|이성득]], [[풍계군|이당]], [[전계대원군|이광]] 등과 함께 [[강화도]]의 한 민가에 감금되었다. 그는 다른 형제들 성득, 이당, 쾌득(해동) 등과 같이 유배지에서 지속적으로 감시를 받았다.
[[1805년]] [[8월 27일]] [[강화도]]에 이철득, 이성득, 이쾌득이 감금당한 집에 불이 나 [[강화부]]유수 오재소(吳載紹)가 조정에 장계를 올려 보고하였다.<ref>승정원일기 1898권 1805년(순조 5년, 청 가경 10년) 8월 29일 기유 19번째 기사</ref> [[1812년]](순조 12) [[2월 24일]] [[강원도]][[관찰사]] 이호민(李好敏)의 비밀 계획에 의해 [[강화도]]로 파견된 [[의금부|금부]][[도사]]의 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그는 얼굴이 철색이고 구레나룻이 짧고 다소 비대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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