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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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Comfort women crossing a river following soldiers.png|thumb|250px|일본군의 다음에 강을 건너는 위안부]]
{{노예제}}
'''위안부 '''({{llang|ja|慰安婦, いあんふ|이안후}}) 또는 '''[[일본군 성노예]]'''({{한자|日本軍性奴隸}}, {{llang|en|Japan's Military Sexual Slavery}})는 [[제2차 세계 대전|제2차 세계대전]] 동안 [[일본군]]의 성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목적으로 강제적이거나 집단적, 일본군의 기만에 의해 [[징용]] 또는 인신매매범, 매춘업자 등에게 납치, 매수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일본군을 대상으로 성적인 행위를 강요받은 여성을 말한다.<ref>이세원.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sec&oid=001&aid=0008627435&isYeonhapFlash=Y "위안부는 성노예"…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신청자료 공개]. 연합뉴스. 2016년 8월 19일.</ref> [[일본]]에서는 '''종군 위안부'''({{llang|ja|從軍慰安婦, じゅうぐんいあんふ|주군이안후}})라고도 일컫는다. 위안부가 되는 방법으로는 징용 또는 납치, 매매 등 다양한 방법이 존재하였다.
 
위안부는 기본적으로 [[조선인]]과 [[중국인]]을 포함한다. 그 밖에 [[필리핀]]과 [[태국]], [[베트남]]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일본 제국]]이 점령한 국가 출신의 여성도 일본군에게 징발되었다. 생존한 사람들은 하루에 30번 이상 [[성행위]]를 강요당했다고 증언했으며 일본군 위안부 피해국 가운데 유일한 유럽 국가인 [[네덜란드]]의 얀 할머니는 [[1990년]]에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임을 밝혔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네덜란드령 동인도]])에 살고 있던 얀 할머니([[얀 루프 오헤른]])는 [[한국방송공사|KBS]] 다큐멘터리 《[[KBS 스페셜]]》과의 인터뷰에서 [[일본군]]의 성폭력을 피해 달아났다가 다시 일본군에게 잡혀왔다는 증언을 한 바가 있다. 얀 할머니의 고백 이후 엘른 판 더 플루흐머니도 일군 위안부 피해자였음을<ref name=autogenerated1>http://www.kbs.co.kr/1tv/sisa/kbsspecial/vod/1383556_11686.html 일본군 위안부 세계가 껴안다 - 1년간의 기록 [[2006년]] [[2월 25일]] 방영</ref> [[1991년]] [[8월 14일]]에는 [[김학순 (여성운동가)|김학순]]이 자신이 위안부였다고 고백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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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유엔 인권소위원회 특별 보고관의 보고서에서는 '일본군 성노예'(Japanese Military Sexual Slavery)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이 문제의 본질을 드러내는 국제적인 용어로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미국 육군]] 소속의 [[전쟁 정보국 (미국)|전쟁 정보국]]([[:en:United States Office of War Information|영어판]], 약칭 OWI)의 심리 작전반(Psychological Warfare Team)은 [[1944년]] [[10월 1일]] 청구서로 ''Japanese Prisoner of War Interrogation Report No.49.''(일본인 포로 심문 보고 제 49호)를 작성했다<ref>[http://www.kananet.com/ianfu/ianfu2-jpkaisetsu.html] Prisoner of War Interrogation Report No. 49.''</ref>.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미군 정보부 심리작전반에 의해 버마에서 포로로 한국인 위안부 20명 및 일본 민간인 2명을 심문한 내용을 기록한 보고서이다.
일본 정부는 공식적으로 '종군위안부'(從軍慰安婦)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으나, '종군'이라는 말에 내포된 자발적인 의미가 부적절하며 일본 극우 세력에서 쓰는 표현이기 때문에 옳지 못한 명칭이라는 지적이 있다<ref>[http://www.hermuseum.go.kr/kor/cyber/cyber02.htm 위안부란 용어해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e역사관</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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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28일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외무상은 서울 외교부 청사에서 공동기자회견을 열어 20여년을 끌어온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문제가 "최종 해결됐다"고 선언했다.
 
*[[2016년]] [[12월 23일]], 기부금은 한국 정부에 의해 설립 된 '화해 · 치유 재단 "에 의해 위안부로 현금 지급되며, 생존 위안부 중 46 명 중 36 명이 수신을하고있다. 사망 한 위안부에 대해 35 명의 유족이 인수를 표명하고있다. <ref> 위안부 34 명이 현금 지급 받아 한국 정부의 재단 발표
[http://www.asahi.com/articles/ASJDR5401JDRUHBI01H.html]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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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시민단체들이 나서서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인도적 지원과 보상을 약속하기도 했다.
 
하지만 2014년8~9월 "(한국 내 단체가 군위안부 문제를) 한국에 뿌리깊게 내린 반일 문제로 방향을 틀었다"면서 "위안부 개인의 행복이나 그들이 놓인 처지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위안부 지원 단체의 정의 실현을 위한 것으로 바꿔치기 된 상황이 벌어졌다"<ref>[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4/08/31/0200000000AKR20140831017900043.HTML ][[연합뉴스]]<span>2014/08/31 12:00 송고 日아시아여성기금 前이사 ‘위안부 한국 태세에 절망’]</span></ref>.
 
=== 일본의 국민기금 지원 약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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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국의 위안부 결의안 ===
[[2007년]] [[11월 8일]], [[네덜란드]] 하원은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 동원에 대해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다.<ref>[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11/11/2007111100066.html ][[네덜란드]]<span> </span>[[의회]]<span>, 위안부 결의안 만장일치 채택]</span>, 《조선일보》, 2007.11.11.</ref> [[캐나다]]에서도 같은 해 [[11월 28일]]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에 대한 일본정부의 공식적인 사과와 책임을 촉구하는 위안부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하였으며<ref>[http://yp.koreatimes.net/kttown_news/sub_article_info.jsp?titleID=88880 캐나다도 日에 사죄요구], 《캐나다 한국일보 케이티타운》, 200.11.30.</ref>, [[12월 13일]]에는 [[유럽의회]]가 위안부 결의안을 채택하였다.<ref>[http://imnews.imbc.com/replay/nwtoday/article/2104131_2710.html (단신) 유럽의회, '위안부 결의안' 채택], 《MBC뉴스》, 2007.12.14.</ref> [[2008년]] [[3월 11일]]에는 [[필리핀]] 하원이 위안부 결의안을 채택하였다.<ref>[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12/2008031200878.html 필리핀 하원,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 채택], 《연합뉴스》, 2008.3.12.</ref>
 
=== 유엔 인권이사회 보고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