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거릿 보퍼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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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castrian Margaret1443-1509 Beaufort: links to Edmund1430-1456 Tudor, son of Owen1400-1461 Tud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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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탄생 ==
[[1443년]] 베드퍼드셔의 블렛소 ([[Bletsoe|Bletso]]) 성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3대 서머싯 백작<ref> 1443년에 1대 서머싯 공작 작위으로 다시 책봉받았다</ref>으로 [[에드워드 3세의]] 넷째아들인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의 손자이고 어머니는 블렛소 ([[Bletsoe|Bletso]])의 [[마거릿 보챔프]]이다. 곤트의 존의 아이들은 그가 그의 정부였던 [[캐서린 스윈퍼드]]와 결혼하기 전에 태어났다. 그의 후처였던 [[카스티야의 콘스탄자]]가 사망하자 [[1396년]] 정식으로 [[캐서린 스윈퍼드]]와 결혼했다. [[1397년]] [[리처드 2세]]의 결정으로 인해 캐서린의 소생들이 적출로 인정되었다.<ref> 보퍼트라는 성을 그대로 썼기에 왕위계승권과 관련없다는 연구도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왕위계승권에서 제외된것은 리처드 2세가 아니라 헨리 4세때로 알려져있다.</ref> 보퍼트 가문의 정통성은 항상 불안정하였고불안정했고 나중에 [[튜더 왕가]]의 왕권을 뒤흔들게 하는 원인 중 하나를 제공하였다제공했다.<ref>출처필요</ref>
 
== 유년기 ==
1세 때인 [[1444년]] 부친 존 보퍼트가 사망하였다사망했다. 당시 모친인 마거릿 보챔프는 임신 중이었으나 사산하면서 마거릿은 막대한 영지를 물려받은 보퍼트 가문의 유일한 상속녀가 되었다. 후견인으로는 왕의 명령에 따라 1대 서퍽 공인 [[윌리엄 드 라 폴]]이 결정되었다. 남편을 잃은 마거릿 보챔프는 곧 6대 웰즈 남작인 [[라이오넬 드 웰즈]]와 재혼하였으나재혼했으나 딸 마거릿을 후견인에게 보내지 않고 함께 지내며 그녀를 직접 양육하였다양육했다.
 
== 결혼 협약 ==
=== 첫 번째 결혼 ===
[[1450년]] [[1월 27일]] 7세 때 후견인인 윌리엄 공의 아들 [[존 드 라 폴]]과 결혼하였다결혼했다. 그러나 이 결혼은 국왕인 [[헨리 6세]]의 명령에 따라 11일 뒤인 [[2월 7일]] 무효가 되었다.
=== 두 번째 결혼재혼 ===
[[1455년]] [[11월 1일]] 12세 때 [[리치먼드 백작인백작]]([[:en:Earl of Richmond|en]])인 [[에드먼드 튜더]]([[:en:Edmund Tudor, 1st Earl of Richmond|en]])결혼하였다결혼했다. [[헨리 5세]]가 사망한 뒤 그의 왕비였던 [[카트린 드 프랑스 왕녀 (1401년)|발루아의 캐서린]]이 [[오웬오언 튜더|오우인 튜더]]([[:en:Owen Tudor|en]])와 재혼하여 낳은 아들이었던 에드먼드 튜더는 [[헨리 6세]]의 이부제(異父弟: 씨다른 동생이다아우)이다. 이 동생을 아꼈던 헨리 6세는 그에게에드먼드에게 왕위 계승권과 막대한 재산을 지닌 상속녀를 짝지워주고자안기려 하였고했고, 그 결과결과로 마거릿의 첫 결혼을 무효화시키고무효화하고 그녀를 동생과에드먼드와 결혼시킨 것이다. 그러나 [[장미 전쟁]] 당시 형인 [[헨리 6세]]와 아내인 마거릿이 속한 랭커스터 왕가를 지지하던 에드먼드 튜더는 요크 왕가의 포로가 되었고, 결혼한 지 1년 뒤인 [[1456년]] 11월 흑사병으로 사망하였다. 당시 임신 7개월의 몸이었던 마거릿은 [[1457년]] [[1월 28일]] 유일한 아들인 [[헨리 7세|헨리 튜더]]를 출산하였다. 아들의 왕위 계승권을 강하게 의식했던 마거릿은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이름을 붙여 주던 당시의 관례에서 벗어나 왕들의 이름인 ‘헨리’를 아들의 이름으로 선택하였다. 또한 아들을 낳으면 당대의 유력자에게 보내 공부시키던 관습과 달리 펨브룩의 영지에서 함께 지내며 직접 아들을 훈육하였다.<br>
그러나 [[장미 전쟁]] 당시 이부형(異父兄) [[헨리 6세]]와 아내 마거릿이 속한 [[랭커스터가|랭커스터 왕가]]를 지지하던 [[에드먼드 튜더]]([[:en:Edmund Tudor, 1st Earl of Richmond|en]])는 요크 왕가의 포로가 되었고, 결혼한 지 1년 뒤인 [[1456년]] 11월 흑사병으로 사망했다. 당시 임신 7개월 몸이던 마거릿은 [[1457년]] [[1월 28일]] 그녀의 유일한 자녀인 [[헨리 7세|헨리 튜더]]를 출산했다. 산모가 만 14세에 못 미치는 작은 체구였기에 산모, 아들 둘 다 사망할 뻔 했고, 이는 그 뒤 셋째, 넷째 결혼에서 불임의 원인이 됐다.<br>
헨리의 왕위 계승권을 강하게 의식한 마거릿은 아들을 낳으면 아버지나 조부의 이름을 붙이던 당시의 관행을 버리고 국왕들의 이름인 ‘헨리’를 선택했다. 또한 아들을 낳으면 당대 유력자에게 보내 공부시키던 관습과 달리 영지(領地)인 [[펨브로크 성]]([[:en:Pembroke Castle|en]])에서 함께 지내며 직접 훈육했다.
 
=== 세 번째셋째 결혼 ===
13세의 어린 과부가 된 마거릿은 자신과 아들의 재산과 권리가 위협 당하는 처지에 놓이자 [[1462년]] [[1월 3일]] 당대의 유력자인 1대 버킹엄 공작 [[험프리 스태포드]]의 아들 헨리 스태포드 경과 재혼하였다. 에드먼드 튜더와의 결혼 이후 마거릿은 더 이상 자녀를 낳지 못했지만 두 부부 사이의 관계는 화목하고 조화로웠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461년]] 오랜 전쟁 끝에 요크 파가 승리를 거두어 [[에드워드 4세]]가 첫 [[요크 왕가]]의 왕으로 등극하고, [[1471년]] [[헨리 6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헨리 튜더는 랭커스터 왕가에서 가장 유력한 왕위 계승 후보자가 되었다. 아들의 정치적 지위가 높아짐과 동시에 위협이 가해지자 위기를 느낀 마거릿은 14세의 헨리 튜더를 그의 숙부 [[재스퍼 튜더]]와 함께 [[브르타뉴]]로 보내 후일을 도모하도록 하였다.
 
=== 네 번째넷째 결혼 ===
[[1471년]] 남편 헨리 경이 사망하자 마거릿은 [[1472년]] 후에 1대 더비 백작이 되는 [[토머스 스탠리]]와 재혼하였다. [[요크 왕가]] 지지자였던 토머스 스탠리와의 결혼은 철저히 정치적이고 정략적인 것이었으나 토머스 스탠리가 [[리처드 3세]]의 즉위 이후 태도를 바꾸어 [[랭커스터 왕가]]와 아내의 아들인 [[헨리 7세|헨리 튜더]]를 지지하기 시작하면서 둘의 관계는 강력한 정치적 동맹자 관계로 발전하였다. 조카들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는 오명 탓에 [[리처드 3세]]의 정치적 기반과 권위가 크게 훼손되자 마거릿은 아들 헨리 튜더를 왕위에 올릴 것을 다짐하고 지지자를 끌어모았다. 맨 먼저 남편 토머스 스탠리를 포섭하는 데 성공한 마거릿은 리처드 3세의 치세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전 왕비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그녀의 딸들에게 접근하여 비밀리에 자신의 아들 헨리 튜더와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장녀 [[요크의 엘리자베스]]의 결혼을 약속하고 동맹 관계를 구축하였다. 비록 헨리 튜더가 브르타뉴에서 영국으로 침공하는 데 실패하면서 이 같은 첫 번째 반란은 곧 진압되고 마거릿 본인 또한 [[사권박탈]]을 당한 뒤 유폐되는 처지에 놓였으나 이후의 침공이 성공, [[보즈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가 전사하면서 헨리 튜더는 비로소 [[헨리 7세]]로 즉위하고 [[튜더 왕가]]를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