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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관 출사 ===
[[1569년]] [[6월]] 그의 나이 31세 되던 해 [[부제학]] [[유희춘]](柳希春)의 부인을 치료하기 위해 [[한성부]]로 가, [[유희춘]] 부인의 병을 고쳤다. [[1569년]] [[이조판서]] [[홍담]](洪曇)과 미암 [[유희춘]]의 천거로 [[내의원]]에 들어가 궁중 의사, 곧 [[의관]]으로서 출사했으며, [[1570년]]에는 유희춘의 병까지 치료하게 되어 [[한성부]] 장안에서 고관대작들에게 이름이 알려지면서 명성을 높였다. 소설과 드라마에서는 [[1574년]] 의과에 급제하였다고 묘사하고 있으나, 실제로 의과 급제자 기록에는 허준의 이름이 없다. 대신 [[1571년]]에 종4품 내의원첨정을 지내고 있었다는 기록이 최초로 보이며, [[1573년]]에는 정3품 통훈대부와 [[내의원]]정에 올랐다. 비록 의과에 응시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동료 의관들보다 뛰어난 의술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578년]] [[9월]] 허준은 내의원첨정으로 있을 때 당시에 새로 출판된 '신간보주동인유혈침구도경' (新刊補註銅人腧穴鍼灸圖經)을 임금으로부터 선물로 하사받았다. [[1587년]]에는 갑자기 심신이 허약해진 [[조선 선조|선조]]임금의 건강이 회복되어 수고로 내의원 책임자와 어의들이 모두 포상을 받았다. 이때 허준은 태의 [[양예수]](楊禮壽)·[[안덕수]](安德秀) 등과 함께 사슴가죽 1장을 선물로 하사받았다. 이후 구안와사에 걸려 입이 돌아간 [[공빈 김씨]]의 남동생을 진료하여 완쾌시켰고, [[1590년]] 허준이 왕자 [[신성군]]([[인빈 김씨]]의 아들)을 살린 공으로 당상관(정3품 통정대부 이상을 말함)으로 승진했다. 허준이 당상관에 가자(되자)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등 삼사와 [[의금부]]에서 일제히 나서서 탄핵, "왕자를 치료한 것은 의관으로서 당연히 해야할 일이고 비록 공이 있다 해도 의관에게 당상의 가자를 내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므로 취소할 것"을 왕에게 여러 번 간청했으나 선조는 듣지 않았다.씨발놈씨발놈씨발놈씨발놈씨발놈씨발놈씨발놈씨발놈씨발놈씨발놈씨발놈씨발놈씨발놈씨발놈씨발놈씨발놈씨발놈씨발놈씨발놈씨발놈씨발놈씨발놈씨발놈씨발놈씨발놈씨발놈씨발놈
 
=== 임진왜란 이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