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파사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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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호흡을 절대시하는 사상적 전통은 인도만이 아니라 인도와 접경한 중국의 [[도교]]에서도 마찬가지로서, [[단전호흡]]을 하면 [[신선]]이 되어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한다.
 
이렇게 호흡을 대상으로 하는 수행은 다양한 수행전통에 존재한다. 하지만 부처님은 수식관 혹은 아나빠나사띠 그 자체에서 얻은 선정력 만으로는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고 판단, 세상의 진리를 있는 그대로 보는 위빳사나를 (이번 불법 시대에는) 최초로 시도하셨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지혜를 기르는 위빳사나 수행에는 사마타의 선정력이 기반이 되어야 한다.<ref> 아주 특이하게 호흡수행 즉 선정수행 없이 위빳사나 수행만으로 깨달음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깨달음에 이른 사람들을 마른위빳사나를 닦은 자들 이라고 한다.</ref> 석가모니 당시 500 아라한 중에 320명이 위빠사나만으로 깨달은 혜해탈자, 60명이 사마타의 심해탈과 위빠사나의 혜해탈을 둘 다 깨달은 양분해탈자였다.

따라서 결국 불교 수행은 계행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호흡수행 등 사마타 수행<ref>(사마타 수행은 호흡명상 말고도 다양하게 있지만 가장 대표적이고 부처님께서 직접 하신 수행법은 호흡수행이다.) </ref> 으로 선정을 닦은 후, 그 선정력으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나와 세상에 대한 무명과 갈애를 타파하여 번뇌를 소멸하고 열반에 이르는 지혜를 기르고 완성하는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것이다. 즉 불교수행에서 호흡이란 지혜의 기반이 되는 선정을 기르기 위한 선정수행의 대상이 된다. 혹은 대념처경의 신수심법 중 신념처이다.
 
다른 종교에도 호흡수행은 존재한다. 하지만 불교의 호흡수행을 통한 선정과 다른 종교의 호흡수행을 통한 선정은 다르다. 다른 종교의 호흡수행은 수행을 통한 고요함과 선정에 끝난다. 반면에 불교의 호흡수행은 수행을 통해 얻은 고요함과 선정력이 갈애와 무명을 타파하고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지혜로 전환되는 위빳사나 수행과 연결되는 정견의 메커니즘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 전체 수행메커니즘은 철저하게 불교의 정견에 기반을 두고 행해진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바른 삼매(정견을 바탕에 둔 삼매)와 삿된 삼매(정견을 바탕으로 두지 않은 삼매)로 호흡수행이나 기타 사마타 수행을 통한 삼매를 구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