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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획 ==
적극적인 계획을 펼쳤던 사람은 국왕에게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마리
마리 앙투아네트의 주도 하에 계획을 세운 것은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다. 먼저 계획의 중심 인물이 왕비의 애인으로 소문난 스웨덴의 귀족 [[한스 악셀 폰 페르센]]이었다. 그에게 협력한 이는 [[슈아죌 대령]]<ref>루이 15세 시대의 저명한 성직자 슈아죌의 친척. 당시 용기병 대령(Claude Antoine Gabriel, duc de Choiseul - Stainville</ref> 과 왕실학자 고그라는 국왕과 왕비에게 충성을 맹세한 개인과 몇 명의 근위대를 빼고는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던 왕당파와의 연계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파일:Montmédy2.JPG|thumb|left|목적지였던 몬메디 요새]]
국경 지대 군대를 맡고 있던 브이에 후작은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지만, 이 계획에 외국인이 참여하는 것을 처음부터 강하게 우려했다. 페르센은 루이 16세의 신하조차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페르센은 왕비에게 신뢰를 주고자 국왕 일가의 도피 비용으로 천문학적인 비용을 제공했다. 페르센의 다른 애인인 엘레오느르 슈리반이 자금의 일부를 유용하게 해주었고, 이두마차와 신분증을 준비했다. 한편, 마리 앙투아네트의 무리한 주장으로 마차는 8두마차와 서베를린형 대형 사륜마차를 새로 주문하여, 인테리어를 화려하게 맞추고, 아름다운 복장을 준비하는 등의 시간 낭비로 탈출은 당초 예정보다 1개월 이상 늦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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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왕비가 주장하는 망명 자체도 어려움이 있었다. 실행을 담당한 브이에 후작은 반역 혐의를 추궁당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국왕의 서명 명령서를 요구하는 등 반발했다. 루이 16세는 국외로 도피라는 불명예를 두려워하여 계획의 변경을 요구하고, 경로를 프랑스 영내만을 통과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이것은 브이에가 처음 제안했던 여정보다 더 위험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최종 목적지는 프랑스 측의 국경 도시인 몬메디 요새로 정해졌다. 여기에 국외 망명 귀족을 불러 합류할 예정이었다. 이 계획대로라면 실제로 망명은 아니었던 것이다. [[벨기에]] 국경에 집결해 있던 오스트리아군의 협력이 필요하기는 했지만 국왕은 어디까지나 국내에 머물 생각이었던 것이다.
[[6월 19일]]에 계획은 실행할 예정이었지만, 직전까지 마리
== 실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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