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현령: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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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제나라 사람으로, 당(唐)나라 대신(大臣) [[방언겸]](房彦謙)의 아들이다. 현재의 [[산둥성|산동]](山東) 지방인 제주(齊州) 임치(臨淄) 출신이다.
 
한때는 [[수나라]]의 관리를 지내기도 했으나 법을 어겨 좌천되었다.<ref>이세민, 《왕도》 김윤진 역, 국일미디어, 2008, p.100, {{ISBN |978-89-7425-518-3}}</ref> 그러던 중 [[당 태종|태종 이세민]]을 만나 그가 돈황공(敦煌公)이었을 때부터 섬기어 [[621년]] 진왕부(秦王府) 18학사(學士)의 일원이 되었으며<ref>왕징룬, 《중국의 황태자 교육》 이영옥 역, 김영사, 2007, {{ISBN |978-89-349-2620-7}}</ref> [[두여회]]와 같이 당조(唐朝) 대각(臺閣)의 규모와 전장문물(典章文物)의 제정을 맡았다. 방현령에 대한 태종의 신망은 매우 두터워서 [[후한]] [[후한 광무제|광무제]]의 명신(名臣) 등우(鄧禹)에 비유되었다. [[626년]] 두여회, [[장손무기]] 등과 [[현무문의 변]]을 꾀하여 태종의 위기를 구하였다. 방현령은 국사를 논할 때에는 항상 결단력이 있는 두여회가 도착하기를 기다렸으며, 두여회 또한 계획을 잘 세우는 방현령의 책략을 받아들였는데 사람들이 두 사람을 가리켜 '방두'(房杜)라 불렀다.<ref name="허청웨이135">허청웨이, 《중국을 말한다9》 김동휘 역, 신원문화사, 2008, p.135, {{ISBN |978-89-359-1448-7}}</ref><ref>증선지, 《십팔사략》 소준섭, 미래사, 2004, p.144, {{ISBN |89-7087-279-5}}</ref> [[629년]] 감찰어사 진사합이 〈발사론〉이라는 글을 통해 방현령과 두여회가 조정의 많은 직책을 겸직하는 것을 비판하자 태종은 "두 사람이 겸직을 하는 것은 재능이 있기 때문이다." 하고 반박하며 진사합을 귀양보냈다.<ref>이세민, p.295</ref><ref name="허청웨이135"/> [[630년]]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감수국사(監修國史)로 올랐고, 이어서 칙령을 받들어 [[위징]] 등이 편찬한 [[북제]], [[양나라|양]], [[진 (위진남북조)|진]], [[수나라|수]], [[주나라|주]]의 각서(各書)를 총감(總監)하여 완성시켰다. 재상으로 있은 지 15년이 되자 태자태부(太子太傅)에 임명되었고 사후에는 태위병주도독(太尉幷州都督)에 추증되었다.
 
== 평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