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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교사 ==
=== 19세기부터 1910년까지 ===
19세기 중반, [[조선]]은 서구의 통상 요구에 대하여 국경을 개방하지 않고 있었다. 1832년부터 1834년까지 코친차이나, 시암, 머스캣에서의 임무를 수행했던 미국의 특사 [[에드먼드 로버츠]]는 미국 국무장관 [[:en:Louis McLane|루이스 맥레인]]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조선 및 북부 중국과 통상을 여는 길은 먼저 일본과 조약을 맺는 것"이라고 언급하였으나, 몇 년 후 그가 병사하는 바람에<ref>{{서적 인용|제목=The Korean struggle for International identity in the foreground of the Shufeldt Negotiation : 1866 - 1882 |url= https://books.google.co.kr/books?id=hRAPN6SZqKUC |저자=Woong Joe Kang |isbn=9780761831204 |쪽=79~80}}</ref> 일본과의 조약은 20년 뒤(1854년)에 실현되게 된다. 1852년 (철종 3년) 음력 12월, 미국의 포경선 1척이 [[동래현]] 용당포 앞바다에 나타난 것<ref>{{서적 인용 | 제목=[[일성록]] |장url =http://e-kyujanggak.snu.ac.kr/home/index.do?idx=06&siteCd=KYU&topMenuId=206&targetId=379&gotourl=http://e-kyujanggak.snu.ac.kr/home/YDG/ILS_CONTVIEW.jsp?ptype=class^subtype=ils^lclass=year^mclass=1800^year=1853^num=^kingname=%EC%B2%A0%EC%A2%85^month=1^day=6 |장= 철종 4년 1월 6일조 |인용문 = 慶尙監司 洪說謨以漂到異樣船問情馳啓}} </ref><ref>{{서적 인용 | 제목=[[일성록]] |장url = http://e-kyujanggak.snu.ac.kr/home/index.do?idx=06&siteCd=KYU&topMenuId=206&targetId=379&gotourl=http://e-kyujanggak.snu.ac.kr/home/YDG/ILS_CONTVIEW.jsp?ptype=class^subtype=ils^lclass=year^mclass=1800^year=1853^month=1^day=18^kingname=%EC%B2%A0%EC%A2%85 |장= 철종 4년 1월 18일조 |인용문 = 慶尙監司 洪說謨 統制使 李膺緖以異樣船徑發馳啓}} </ref>이 조선과 미국간의 최초의 접촉이었다. 중국에 체류하던 미국인 상인 프레스턴( W. B. Preston)이 자신 소유의 상선(商船)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號)와 일행을 이끌고 [[대동강]]에 침입하였다. 프레스턴 일행이 통상을 요구하며 행패를 부리자 평양 군민(軍民)들이 반격하여 배를 불태워버린 사건([[제너럴셔먼호 사건]], 1866년)이 발생하였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은 [[신미양요]](1871년)를 일으킨다. 1882년 5월 22일(음력 4월 6일) [[조선]]의 전권대신 [[신헌]]과 전권부관 [[김홍집 (1842년)|김굉집]]은 미국 전권대신인 해군제독 [[로버트 슈펠트]]와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의정(議定)했다.<ref>1882년 ~ 의정(議定)했다.: [[정교]](鄭喬) 저, 조광(趙珖) 편, 《대한계년사 1》(소명출판, 2004년) 93쪽.</ref> 이어 1905년 [[러일전쟁]]의 중재를 맡은 미국은 식민지 [[필리핀]]의 안전을 일본으로부터 보장받기 위해 같은 해 7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음으로써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인정하였다.<ref>{{서적 인용 |제목= 지구촌시대 남북한의 외교․안보․통일론 | 저자= 김강녕 |연도= 2010 |출판사=신지서원 |위치= 경주시 |장=오바마 행정부 출범과 한국의 대미외교전략 |쪽=227|id={{ISBN |978-89-5531-188-4}} |인용문= <!--이어 1905년 러일전쟁의 중재를 맡은 미국은 식민지 필리핀의 안전을 일본으로부터 보장받기 위해 같은 해 7월 태프트-카쓰라협약(Taft-Katsura Agreement)을 맺음으로써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인정하였다.<sup>8)</sup> 8) 백광일, “미국의 대한 안보정책,” [[한국정치학회]], 『한국정치학회보』, 제16집, 1982, p.197--> }}</ref>
 
=== 임시정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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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미 대사 [[장면]]도 대한민국 정부의 긴급훈령을 받아 [[미국 국무성]]에 알려 사태의 절박성을 전하였다. 6월 25일 저녁 장면은 이승만과 통화 후, 미국의 상 · 하원을 찾아다니며 한국 파병을 역설하였고, 이후 [[유엔]]과 국제사회에 [[조선인민군]]의 남침을 알리고 한국 전쟁에 참전해줄 것을 설득하여 [[미군]]과 유엔군의 한국 파병을 이끌어냈다. [[미국]]은 [[유엔]] [[UN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를 열어 한국 문제를 건의했다. 이에 따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6월 26일 오전 4시에 소집되었고,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조선인민군의 즉각적인 전투 행위 중지와 [[38도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청하는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제82호|결의안]]을 9대 0으로 가결하였다.([[유고슬라비아]]는 기권) <ref>{{서적 인용 |인용문=이에 따라~(유고슬라비아는 기권) |저자=이기택 |제목=국제정치사 |출판사=일신사|연도=2000 |쪽=471~472}}</ref> 6월 26일 장면은 [[백악관]]에서 미국 대통령 [[트루먼]]을 만나 미군의 한국 파병을 요청하였고, 6월 27일의 미국의 대북한 선전 포고와 유엔에 대한민국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여 유엔군의 한국 전쟁 참전결정을 이끌어냈다. 1950년 6월 26일 밤 10시 반경 [[이승만]]은 [[도쿄]]에 있는 [[더글러스 맥아더|맥아더]]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하였다.<ref>{{서적 인용|저자= [[강준만]] |제목= 한국현대사산책: 1950년대편 1권 |쪽=50~51|인용문=<!--경무대 비서 민복기의 증언에 의하면, 이승만은 26일밤 10시 반경 동경에 있는 미 극동군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전화를 걸었다. … 당신네들이 빨리 우리를 도와 주지 않으면 여기 한국에 있는 미국인 2천500명을 우리가 다 죽이겠소.’ …54)… 54) 이한우, 『거대한 생애 이승만 90년 하(下)』(조선일보사, 1996), 78~79에서 재인용. --> }}</ref> 미국과 UN은 대한민국 영토에서 [[조선인민군]]을 철수하라는 결의를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에 통고했으나, 이에 응하지 않아 6월 27일 UN 안보리 이사회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해 한국 땅에서의 즉각 철수를 권고하였다. "회원국들에게 군사 공격을 격퇴하고, 그 지역의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데 필요한 원조를 [[대한민국]]에 제공할 것"을 7대 1(기권2)로 결의했으며, 이 날 [[해리 S. 트루먼]]은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대한민국]]에 대한 해군 및 [[공군]]의 지원을 즉각 개시하라"고 명령했다.<ref>{{서적 인용|인용문=회원국들에게 군사 공격을~|저자=김창훈|제목=한국외교 어제와 오늘 |출판사=[[다락원]]|연도=2002|쪽=50}}</ref> 미국은 [[제2차세계대전]] 참전 시에 의회가 선전포고를 결의한 것과는 달리, 한국 전쟁에 있어서는 [[트루먼|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의 해외파병권에 의하여 참전을 결정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412010032920101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4-12-01&officeId=00032&pageNo=1&printNo=12057&publishType=00020 餘滴: 애치슨 라인]〉 《경향신문》(1984년 12월 1일) 1면. <!--“... 한국전쟁수행은 議會선전포고권을 피한 대통령의 해외派兵權에 의해서 다뤄졌었다. ... 미국은 이러한 도전을 대통령에게 주어진 「大權」에 따라 대처했다. 그것은 그후 미국의 해외파병과 참전의 길을 무한정하게 연 先例가 됐다.”--></ref> 1950년 6월 27일 [[이승만]]은 대통령과 내각으로 구성된 망명정부를 일본에 수립하는 방안을 주한 미국 대사 [[존 무초]]에게 문의해왔고 이는 그대로 [[미국 국무부|미 국무성]]에 보고되었다.<ref name="야마">[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6041470133 일 산케이신문, 일 산케이신문, "50년 일본 야마구치에 이승만, 망명정부 구상" ] 조선일보 1996년 4월 14일</ref> 6월 28일 [[서울특별시|서울]]은 [[조선인민군]]에게 함락당하였으나 [[장면]]은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방송을 통해 유엔 결의 사항 등을 본국에 방송하였다. 맥아더는 6월 29일 하네다에서 비행기를 타고 수원으로 와서 한강방어선지역을 시찰하고 워싱턴에 지상군 투입을 요청하였다.<ref>서규화,〈[http://www.army.mil.kr/gbbs/gunsa/pdf/122.pdf 6.25전쟁시 미 제24사단의 초기지연작전 재조명]〉 [[대한민국 육군|육군본부]], 《[[군사연구]]》 제122집(2006년). 78쪽. <!--“6월 27일부로 한국전쟁에 대한 작전권을 부여받은 맥아더 장군은 6월 29일 06:10에 한국 전선을 직접 시찰하기 위해 하네다 공항을 이륙했다. <sup>8)</sup> 맥아더 장군 일행은 수원에 도착하여 처치 장군으로부터 전쟁 상황을 보고받은 후, 직접 전투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한강방어선지역을 시찰했다. 여기서 맥아더 장군은“미 지상군전투부대가 투입되어야만 대한민국을 침략군으로부터 구출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일본으로 돌아와 워싱턴에 미지상군 투입을 긴급히 요청했다.<sup>9)</sup>...8) Paige, The Korean Decision June 24-30, 1950, pp.229-230, 이때 맥아더 장군을 수행한 참모들로는 참모장 알몬드 장군, 작전참모부장 라이트 장군, 정보참모부장 윌로비 소장, SCAP의 정치국장 휘트니 준장, 극동공군사령관 스트래트메이어 장군 등 15명이었다. 9) Paige, The Korean Decision June 24-30, 1950, pp.236~237, 이때 워싱턴 당국에 요청한 주요내용은 “현 전선을 유지하고 실지를 회복하는 길은 미 지상군을 투입하는 일이다. 허락만 해준다면 이 지역에 1개 연대전투단을 지원군으로 보내고, 이미 일본에 주둔하고 있는 주일미군 2개 사단을 증강시켜 반격작전에 투입할 것이다”이다.”--></ref><ref>Glenn D. Paige, 《The Korean decision, June 24-30, 1950》 Free Press, (1968) 229-230쪽.</ref><ref>Glenn D. Paige, 《The Korean decision, June 24-30, 1950》 Free Press, (1968) 236~237쪽.</ref>
 
한국군은 [[더글러스 맥아더|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의 지휘 하에 편입, 대폭 증강하여 [[낙동강]]선을 마지막 방어선으로 삼고 반격하였다. [[트루먼|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이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지상군 투입과 38선 이북의 군사 목표를 폭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함에 따라(6월 30일),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일본 [[규슈]]에 주둔하고 있던 [[미국 육군]] [[:en:24th Infantry Division (United States)|제24사단]] 21연대가 [[부산광역시|부산]]에 상륙했다.(7월 1일) <ref>Varhola, Michael J. (2000). 《Fire and Ice: The Korean War, 1950–1953》 Mason City, Iowa: Da Capo Press. {{ISBN |978-1-882810-44-4}}. 2쪽.</ref> 이 부대는 [[대대장]]인 [[찰스 스미스]](Charles B. Smith)[[중령]]의 이름을 따서 [[스미스 부대]](Task Force Smith)로 알려졌다. [[스미스 부대]]는 7월 5일 [[평택시|오산]] 북쪽 죽미령에서 [[조선인민군]]과 첫 교전을 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 ([[오산 전투]]) <ref>[[강준만]], 앞의 책, 68쪽.</ref> [[스미스 부대]]의 무참한 패배로 미국 지상군의 전선 투입이라는 위세만으로 조선인민군의 남침이 중단되기를 바랐던 [[더글러스 맥아더]]나 윌리엄 딘의 한가닥 기대는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ref>{{서적 인용|저자=전쟁기념사업회|제목=《한국전쟁사》 1권|출판사=행림출판|연도=1992|쪽=196~197}}</ref> 나중에 [[더글러스 맥아더]]의 뒤를 이어 유엔군을 지휘하게 되는 [[매슈 리지웨이]]는 그의 회고록에서 맥아더는 침공군의 세력을 잘못 판단했으며 [[인민군]] 10개 정예사단 앞에 1개 대대를 투입한 것은 맥아더의 지나친 오만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스미스 부대의 참패를 성공이라고 자평했다. 미 지상군 참전에 예기치 않던 인민군이 미군 참전을 직접 목격하고 소련 전법에 따라 일단 전선을 재정비하면서 미군은 10일을 벌었다는 것이다.<ref>{{뉴스 인용 |제목 = 40년 만에 다시 풀어보는 6ㆍ25의 수수께끼:4 |url = http://www.kinds.or.kr/ |출판사 = 한국일보 |저자 = 정일화 |쪽 = 5|날짜 = 1990-06-20 <!--url없이 사용됨 |확인날짜 = 2008-04-09-->}}</ref>
 
전쟁발발 15일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인 7월 10일, [[장면]]은 "38선은 의미를 상실했으며 전한국의 해방과 통일은 필수적"이라고 주장하였다.<ref>{{웹 인용 |url = http://images.library.wisc.edu/FRUS/EFacs2/1950v07/reference/frus.frus1950v07.i0009.pdf | 제목 =The United States Representative at the United Nations (Austin) to the Secretary of State |인용문=<!--He said that 38th parellel was meaningless and that liberation and unification of all of Korea was essential, after which there should be UN supervised elections for whole country.--> |웹사이트=FRUS 1950 Vol. VII Korea |출판사=[[미국 국무부]] |쪽=354 }}</ref> 7월 13일, 이승만은 미국 CBS와의 인터뷰에서 "조선인민군의 행동은 38선을 제거시켜 주었고, 38선에 의한 분단이 지속되는 한 한반도에서 평화와 질서는 결코 유지될 수 없다.",<ref>{{웹 인용 |url = http://images.library.wisc.edu/FRUS/EFacs2/1950v07/reference/frus.frus1950v07.i0009.pdf | 제목 =Memorandum by the Director of the Office of Northeast Asian Affairs (Allison) to the Assistant Secretary of State for Far Eastern Affairs (Rusk) |인용문=<!--...the action of the North Korean forces had obliterated the 38th parallel and that no peace and order could be maintained in Korea as long as the division at the 38th parallel remained.--> |웹사이트=FRUS 1950 Vol. VII Korea |출판사=[[미국 국무부]] |쪽=373 }}</ref> "침략자를 격퇴하는 데 있어 한국군은 결코 38선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고 주장하였다.<ref>{{웹 인용 |url = http://images.library.wisc.edu/FRUS/EFacs2/1950v07/reference/frus.frus1950v07.i0009.pdf | 제목 =The Secretary of State to the Embassy in Korea |인용문=<!--16. Press report June [July] 13 quotes Pres Rhee as voicing determination ROK not to stop at 38th parallel in repelling invaders.--> |웹사이트=FRUS 1950 Vol. VII Korea |출판사=[[미국 국무부]] |쪽=387 }}</ref> 이승만의 이 언명은 미국을 크게 놀라게 하여 [[딘 애치슨]]으로 하여금 주한 미국대사 [[존 무초]]에 게 그러한 언명을 모든 것을 다해 어떻게든 막으라는 전문을 화급히 치도록 했다. 미국은 38선에서 정지할 것이며, 조선인민군을 그렇게 하였듯이, 대한민국 국군을 그곳에서 막을 것이라는 미군의 성명도 발표되었다. 그러나 무초에 따르면, 그는 노 정객 이승만의 입을 막을 수 없었다. 그에 따르면, 한국민들은 전전부터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국부의 몰락 이후 깊은 절망에 빠져들어 우리는 어떻게 공산주의자들을 저지할 것인가 걱정하고 있었다.<ref>{{웹 인용 |url = http://www.trumanlibrary.org/oralhist/muccio1.htm |제목= Oral History Interview with John J. Muccio |출판사= Harry S. Truman Library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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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군의 감축(1970년대) ====
1960년대에 결속강화되었던 한·미 군사동맹은 1970년대 접어들어 전환기를 맞이하였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한국과 미국이 공동목표와 공동이익을 추구한다는 측면에서 동맹이 결속되었지만, 1970년대에는 한국과 미국의 외교정책수행에 있어서 견해 차이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견해 차이의 시발점은 [[닉슨 독트린]]이었다. 이 원칙의 일환으로 1970년 7월 미국은 주한미군의 감축계획을 한국정부에 공식적으로 통고했다. 한국정부의 강력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한국군의 현대화를 대안으로 제시한 채 상당수 감축시켜 왔다.<ref>{{서적 인용 |제목=[[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장=[[: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정치/한국의 정치/한국의 외교/한국과 미국의 관계#한국과 미국의 관계〔서설〕|한국과 미국의 관계〔서설〕]] |연도= 2004|출판사=도서출판 범한 |인용문=이 원칙의 일환으로 1970년 7월 미국은 주한미군의 감축계획을 한국정부에 공식적으로 통고했다. 한국정부의 강력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한국군의 현대화를 대안으로 제시한 채 상당수 감축시켜 왔다. }}</ref> 한국은 이 시기부터 자주국방을 정책목표로 설정하게 되었다.<ref>{{서적 인용 |저자= 김달중 |제목= 한국의 외교정책|연도= 1998 |출판사= 오름 |위치= |id= {{ISBN |89-7778-058-6}} |쪽=37}}</ref>
 
1972년 미국이 중국과 화해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동북아시아의 냉전체제에 모종의 변화가 오리라고 예상하는 가운데 [[7·4 남북 공동 성명]]이 있었고, 이어 10월 17일 한국내에서는 [[유신 체제]]가 성립되었다. [[닉슨]]과 [[키신저]] 시대에 비롯한 한국에서의 유신체제는 당분간 한미 관계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은 채 안보·경제·대 유엔 외교상의 협조가 이루어져 왔다. 그러다가 1974년 닉슨이 사임하자 그 뒤를 이은 [[포드]]는 긴급조치로 인하여 미국회에서 한국내 문제에 대한 약간의 비판이 있음에도 방한(訪韓)하여 한·미 유대에 아무런 변화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유엔에서의 제3세계권의 발언권 강화와 세계적인 화해 분위기로 유엔군 사령부와 언커크([[:en:UNCURK|UNCURK]])의 해체가 이루어졌고 주한미군 철수 문제가 거듭 논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이에 대처하기 위한 방법으로 미국은 한국의 방위산업 육성과 자주국방을 위한 국군현대화에 차질이 없도록 유신 이후에 적극 지원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