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남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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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일본유학===
서남동은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면의 [[개신교]] 집안에서 출생했다. 그의 부모는 [[전라남도]] [[목포시]]에서 활동하던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사]]들의 전도로 기독교를 접했는데, 서남동도 부모의 영향으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기독교 계열 학교인 목포영흥학교와 [[전주신흥고등학교|전주신흥학교]]<ref>[[전주신흥고등학교]]는 이 학교를 졸업한 민중신학자 서남동 동문의 뜻을 기리는 차원에서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인 2018년 5월 24일(목)에 교내 100주년 기념관 1층 백년홀의 명칭을 '서남동홀'로 명명하였다.</ref>에서 공부했으며, [[1936년]] 일본 [[도시샤 대학교]] 신학부에 진학했다. [[외국어]] 공부과정인 예과 2년과 4년제 본과에서 공부하던 신학생 시절 서남동은 [[재일 한국인]]들의 비참한 삶을 보면서 [[민중]]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당시 재일 한국인들은 [[일본제국]]의 [[식민지]] 수탈을 피해 [[일본]]에 온 사람들이었는데, 일본 사람이 경영하는 [[공장]]이나 논밭에서 일하면서 겨우 먹고 사는 처지였다. 이를 보면서 서남동은 자연히 [[민중]]들과 함께 살았던 [[갈릴래아]]의 [[예수]]를 발견하게 된다. 교회사학자 김수진에 의하면 서남동은 [[목포]]에서 목회하던 박연세 목사에게도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박연세 목사가 [[일본제국]]의 [[일본 천황|천황]] 신격화에 반대하여 재판정에 서서도, 그리스도를 왕으로 믿는 [[기독교]] 신앙에 따라 [[그리스도]]가 [[일본 천황]]보다 높다고 주장하는 의연함을 보면서 감동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박목사가 순교하자 시신을 수습하고 가족들에게 연락했다고 한다.
 
===신학자가 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