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래의 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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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시]]<br />
[[이제초]]<br />
[[채수영 (조선후기)|채수영]]<br />
[[김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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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래의 계획이 일부 어그러진 것 또한 실패를 가져온 원인 중 하나다. [[박종일]](朴鍾一)로 하여금 한양에서 난을 일으켜 중앙의 혼란을 꾀하였으나 주살되고, 창성(昌成)·강계(江界)·초산(楚山)·위원(渭原) 등지의 포수(砲手)들의 내원을 기대하였으나, 모두 체포되었으며, 점령한 8읍이 함락되어 정주성이 고립되고, 붙들린 포수들이 정주성 공격을 도왔으며, 호병(胡兵, [[청나라]] 군대)을 청하려 하였으나 부하의 번의로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 기타 ==
사건의 관련자이며 [[홍경래]]와 통했던 [[채수영 (조선후기)|채수영]]은 [[1817년]](순조 17) [[3월]] 다시 사람을 모아 [[조선 순조|순조]]를 폐위하고 [[은언군]]의 서자 [[이철득]]을 추대하려다가 거사 직전 가담자 박충준의 밀고로 실패하였다.
 
== 의의 및 평가 ==
지도자들이 내세운 봉기의 이념은 세상을 구원할 정진인(鄭眞人)을 받들어 사업을 벌인다는 [[참위설]]이 가장 중요한 몫을 하였으며, 토호 관속을 향해서는 지역 차별과 정치적 모순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한편 토지 문제 등 사회 개혁의 구체적인 내용을 제시하지 못하여 전개 과정에서 일반 농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끌어내지 못하고, 단지 곡식 분배 등을 통해 빈민을 불러모으는 데 그친 것이 커다란 한계였다.
 
홍경래의 난은 극도로 피폐한 조선 말기의 생활불안과 억울한 감정에서 오는 위정자에 대한 반항이라는 평가도 있다. 비록 정부의 힘으로 평정되기는 하였으나, 정치의 폐단이 가시지 않고 [[1813년]](순조 13) 음력 11월에 제주도의 [[양제해]](梁濟海)의 음모 사건, [[1816년]](순조 16) 음력 10월 [[성천군]] [[성천군|성천읍]]의 [[승려]] [[학상]](學相)이 [[홍경래]]의 여당이라 자칭하며 사서 표현에 의하면 흉패한 행위를 한 것 등으로 보아 홍경래 난은 일시 돌발적인 군란(軍亂)이나 민란에 그치지 않았다. 그 여파가 파급되어 민중의 동요는 걷잡을 수 없이 되었으며 철종 때 곳곳에서 민란이 계속되었던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 함께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