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수영의 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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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건 ==
[[1817년]](순조 17) [[3월]] 그는 동조자를 규합, [[충주]]에 사는 안유겸, 김계호(金啓浩). 박충준. 신성문(申盛文) 등과 함께 조직을 만들고 사람을 모아 거병을 준비하였다. 이들은 [[김조순]], [[박종경]] 등의 당시 고관들의 정책을 비판하였다. 거사 직전 이들은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한편 [[채수영 (조선후기)|채수영]], 안유겸, 김계호, 신성문, 박충준 등은 [[전주부]] 김맹억(金孟億, 당시 37세)의 집에 모여 거사 날짜를 잡았다. 그밖에도 신여헌(申汝獻), 이인하(李寅夏) 등이 가담했다가 체포되어 [[의금부]]로 압송되었다.
 
[[채수영]] 등은 외국군의 배가 들어오고 있다, [[홍경래]]가 아직 살아 있다, 이희선 등이 아직 살아 있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시중에 유포하여 민심을 선동한 뒤, 군사를 모아서 비밀리에 거사를 계획하였다.
이들은 [[충청도]]의 화적인 장응인(張應人, 당시 39), 권훈(權塤, 당시 35) 등과 그들이 이끄는 화적 무리와도 연대, [[전라 감영]]과 [[충청 감영]]을 습격할 계획을 세웠다. 전라감영과 충청감영을 거병의 실패나 패전했을 때 [[고군산]]에서 [[제주도]]로 피난한 뒤 [[대마도]]에 군사를 지원받아 재공략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가담자의 한 명인 박충준이 [[의금부]]에 밀고함으로서, [[3월 16일]]경 전원이 전주 김맹억의 집에서 체포되었다.
 
이들은 [[충청도]]의 화적인 장응인(張應人, 당시 39), 권훈(權塤, 당시 35) 등과 그들이 이끄는 화적 무리와도 연대, [[전라 감영]]과 [[충청 감영]]을 습격할 계획을 세웠다. 전라감영과 충청감영은 긴장했다. 이들은 전라감영과 충청감영을 점령한 뒤 [[한성]]으로 들어가 [[조선 순조|순조]]를 폐위시키고 [[은언군]] 인의 서자 [[이철득]]을 추대하기로 했다. 전라감영과 충청감영을 거병의 실패나 패전했을 때를 대비해, [[고군산]]에서 [[제주도]]로 피난한 뒤 [[대마도]]에 군사를 지원받아 재공략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가담자의 한 명인 박충준이 [[의금부]]에 밀고함으로서, [[3월 16일]]경 전원이 전주 김맹억의 집에서 체포되었다.
 
== 체포 이후 관련자 처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