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완수 (1898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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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지방법원 통영지청 판사를 거쳐 [[1929년]]에 대구복심법원으로 전근하였고, [[1933년]]에 경성복심법원 판사를 맡았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다시 대구복심법원과 대구지방법원 판사로 돌아왔다.
 
총독부 판사로 20년 이상 근무하는 동안 일본 정부로부터 여러 차례 훈장을 받아, 대구지방법원 판사로 재직 중이던 [[1942년]]을 기준으로 정5위 훈5등에 서위되어 있었다. 오완수가 경성복심법원 판사로 근무하던 [[1935년]]에 경성복심법원에는 조선인 검사는 한 명도 없고, 조선인 판사 역시 오완수와 [[백윤화]] 두 명뿐이었을 정도로 [[일본 제국]]의 신임을 받았다.<ref>{{저널 인용
|저자=김병로
|제목=半島의 思想判檢事陣, 高等·覆審·地方의 三法院을 通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