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 (양나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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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5년]] [[5월]]에 관례 의식을 치르고 성인이 된 이후에는 국정에 참여하여 백성에게 어진 정치를 펼쳐보이기도 했으며 문장가로서도 매우 유명하였다. 3만여 권의 장서들을 소장하였다고 전해지며 그로 인해 주변에는 항상 유명한 문인들이 모였다. 소통은 문인들과 함께 여러 유명한 문장을 모은 《[[문선]]》을 편찬했고 《[[금강경]]》을 32분(分)으로 편집하였다.
 
[[531년]]에 배를 타고 연못을 유람하던 도중 시녀가 장난으로 배를 흔드는 바람에 배가 전복되어 물에 빠지는 사고를 당했고 그해 [[5월음력 30일4월 6일]]에 향년 31세로 사망하였다. 사후 '''소명황태자'''(昭明皇太子)로 추시됐다.
 
[[552년]]에 손자인 [[소동]]이 황제로 즉위한 뒤 소통을 '''소명황제'''(昭明皇帝)로 추숭했다. 이후 [[555년]]에 셋째 아들인 [[소찰]]이 [[후량 (남조)|후량]]을 세우고 황제로 즉위한 뒤 또한 소명황제로 추숭했고 묘호를 더하여 '''고종'''(高宗)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