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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쟁으로 카르타고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막대한 배상금을 로마에 물어주고 지중해 서부의 재해권과 이권을 로마에 빼앗기고 말았다.
[[제3차 포에니 전쟁]]은 [[기원전
=== 멸망 ===
[[파일:Tunisie Carthage Ruines 08.JPG|thumb|right|카르타고의 폐허 유적]]
[[기원전 149년]] 로마는 카르타고의 조약 위반에 따른 대가로 수도 카르타고를 버리고 이주하라는 조건으로 카르타고를 압박해왔다. 카르타고 원로원은 이 요구를
[[제2차 포에니 전쟁]]을 끝내기도 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외손자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아프리카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3년에 걸친 공격으로 결국 카르타고 도시를 함락하고, 주민을 완전히 축출했으며, 도시를 불태우고 소금을 뿌려 황무지로 만들었다. 하지만 로마는 살아남은 카르타고 시민들을 아프리카에서 살수 있도록 했다. == 경제 ==
=== 상업국가 ===
카르타고는 무역으로 번성하였다. 기원전 3세기 전반까지 서(西)지중해에서 최대의 세력을 떨쳤으며, 무역으로 번영하였는데 특히 상업귀족의 세력이 매우 강대하였다.
==== 교역한 상품 ====
카르타고는 지중해 연안의 풍부한 광물 자원을 장악했다. 사르데냐는 광물 자원이 물량으로는 적었으나, [[납]], [[아연]], [[구리]], 철, [[은]] 등 종류는 매우 다양했다. 히스파니아 광산은 매장량이 보다 풍부했고, 250년간 계속 채굴했지만 여전히 납, 아연, [[수은]], 구리, [[금]], 은과 수백만 톤의 [[철광석]]을 생산했다. 히스파니아의 [[카디스|가데스]]를 떠난 카르타고인들은 아마 오래전의 페니키아인들이 한 것처럼, 북쪽 [[콘월]]로 항해하여 값진 [[주석 (원소)|주석]]을 배에 싣고 오기도 했다. 이 곳을 거점으로 남쪽으로 아프리카 해안 방향으로 [[황금 해안]], [[카메룬]], 심지어 [[가봉]]까지 갔으며 그곳에서 금, [[상아]], [[노예]], 전쟁용 코끼리를 실어왔다. 카르타고에서 생산한 많은 광물은 본국 주물 공장뿐 아니라 동부 지중해의 [[헬레니즘]] 세계로 운송되었다. [[제1차 포에니 전쟁]] 전 수세기 동안 동쪽과 서쪽을 잇는 해운업은 사실상 카르타고가 독점했다. 지중해 서부에서 [[고대 그리스|그리스]]
=== 농업 ===
카르타고인은 과학적 영농에 특히 노예들을 이용한 집단 농장([[플랜테이션]])의 발달에 이바지했다. 로마인들은 이들에게서 대규모 노예 노동력을 이용하여 판매용 단일 곡물이나 단일 산물을 재배하는 기법을 배웠다.<ref>M 하이켈하임, p.172. 146년 카르타고가 멸망한 직후, 로마 [[원로원]]은 틀림없이 이탈리아의 부유한 지주들이 활용할 용도로 [[마고]](Mago)가 카르타고의 농업에 관해서 쓴 32권의 고전을 그리스어로 번역하도록 지시했다. - 마고의 저서는 로마인들으 보존하고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카르타고 문헌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저서가 후기 로마의 농업 관련 저자들에게 끼친 영향은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아울러 그 영향력은 중세 [[에스파냐]]의 [[무어인]]과 아마 에스파냐인에게도 간접적으로 전달되었다. 에스파냐인들은 [[신세계]]에서 노예 노동력을 이용한 플랜테이션 농업을 뿌리내렸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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