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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통감》은 외기(外紀)ㆍ삼국기(三國紀)ㆍ신라기(新羅紀)ㆍ고려기(高麗紀)의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 단군 조선에서 삼한, 삼국의 건국에서 [[신라]] [[문무왕]] 9년([[669년]])까지, [[문무왕]] 9년에서 [[고려 태조]] 18년([[935년]])까지, 이후 고려 말까지를 서술하였다. [[단군조선]]에서 삼한까지를 외기로 한 것은 사서가 없어져 자료가 부족한 탓에 왕대별 서술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삼국기는 삼국을 대등하게 취급하여,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의 예에 따라 무통(無統) 즉 정통이라 쳐줄 왕조가 없다고 서술한 점은 《[[동국사략]](東國史略)》의 신라 중심 서술과 차이가 있다. 또한 연대 표기도 《동국사략》과는 달리 당대의 사실대로 즉위년칭원법(卽位年稱元法)을 채택하여 사실을 온전히 보전하자는 입장에 서 있다. 삼국의 연대기는 연호로 표기하지 않고 [[중국]]과 삼국의 연대를 아울러 썼으며, 또한 신라기를 독립시킨 것은 신라통일의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해서였다는 지적이 있다.
 
범례에 따르면 조선 초기, 특히 [[세종]]대에 연구가 활발했던 《자치통감》과 《자치통감강목》의 영향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범례는 《자치통감》에 따르고, 필삭(筆削)의 정신은 《자치통감강목》을 따라 강목의 규례에 따라 강령(綱領)을 제시하고 다음으로 사실을 서술하여 두 사서의 체제를 절충하였다. 다만 거서간(居西干)ㆍ이사금(尼師今) 등 신라 고유의 명칭을 왕으로 바꾼 것은 차이가 있다. 편찬자들의 면모를 보면 세조대 훈신과 성종대에 등장하기 시작한 신진 사림들이 함께 참여한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정치적 차원에서 아직 정통론을 도입하지 않고 있지만 문화적 측면에서 기자조선-마한-신라로 이어지는 문화의 흐름을 주류로 정립하려 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성종 자신이 적극적으로 편찬에 개입하고 신진 사림이 참여함으로써 성종과 사림의 역사의식이 크게 반영되었다. 사림의 성리학적 명분주의는 성종의 왕권 안정에 유리하게 작용하였으며, 강상의 명분을 강조함으로써 세조와 그 훈신(勳臣)에 대한 비판의 뜻을 담았다. 이를 통하여 조선 초기 역사편찬과 서술은 일단락되었다.<ref>{{웹 인용|url=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B%8F%99%EA%B5%AD%ED%86%B5%EA%B0%90&ridx=0&tot=19|제목=동국통감(東國通鑑)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언어=ko|확인날짜=2018-06-03}}</ref>
 
조선 전기 대표적 관찬사서(官撰史書)의 하나로 꼽히며, [[국립중앙도서관]]과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등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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