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민주 항쟁: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83번째 줄:
1987년 [[5월 17일]], 노동자였던 황보영국은 부산상고(현 개성고) 앞에서 '독재타도' 등을 외치며 분신했으며, 일주일 뒤 사망하였다.<ref>이상민·박진국·전대식, [http://www.busanilbo.com/news2000/html/2007/0605/010020070605.1005105952.html 시민이쓰는 6월항쟁 - (6) 청춘 불사른 황보영국씨], [[부산일보]]</ref> 이튿날인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 광주항쟁 7주년 미사에 [[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이 경찰에 의해 축소·은폐되었음을 폭로하였다.<ref>상세한 것은 [[박종철]] 참조.</ref><ref>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경찰에 의해 축소·은폐된 사실은 박종철의 삶을 소재로 정하여 제작한 [[문화방송]] 드라마에서 고발된 적이 있다.</ref> 이에 [[대한민국 제5공화국|제5공화국]] 정권을 비판하던 국민들은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옳지 못함에 크게 분노하였고, 이후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에서 자주 일어났다. 이후 [[5월 23일]] "'''박종철 고문살인은폐조작규탄 범국민대회 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이들은 [[6월 10일]]에 규탄대회를 갖기로 결정하였다(그날은 노태우가 민정당 대선 후보로 선출된 날이기도 하다).
 
전두환은 후계자로 국무총리 노신영을 지명했으나, [[5월 26일]] 고문치사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어 [[노신영]] 국무총리를 경질하였다. 이후 [[이한기]]를 신임 총리로 교체하였다. 이튿날 전국의 재야지도자 2200여 명이 함께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하였고, [[한국 기독교 장로회]] [[향린교회]]에서 발기인 대회<ref>향린교회에서는 이 사건을 기념패로 만들어 기념하고 있다.</ref> 를 열었고, "호헌 조치 철회 및 직선제개헌 공동쟁취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를 향린교회에서는 교회문에 기념패를 만들어 기억하고 있다.
 
[[6월 9일]] [[연세대학교]] 학생인 [[이한열]]이 학교 앞 시위 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부상([[7월 5일]] 사망)을 입었다.
91번째 줄:
1987년 6월 10일 잠실체육관에서 [[민주정의당]] 제4차 전당대회 및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 개회가 열렸고, 노태우는 이 대회에서 민정당의 제13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ref>{{웹 인용|url=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791582_6035.html|제목 =[6.10 민정당전당대회] 전당대회 및 대통령후보 지명대회[강성구]|저자=MBC뉴스데스크|날짜=1987-06-10|확인날짜=2013-05-03}}</ref>
 
그러나 같은 날 전국에서 반정부 [[민주화]] 시위가 일어난다.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의 주최로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서울주교좌대성당]]에서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개최하였다.<ref>현재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은 이 사건을 6.10민주항쟁 발생지라고 새긴, 돌로 만든 조형물로 기념하고 있다.</ref> 이를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서울주교좌대성당에서는 '6월 민주항쟁 발생지'기념비를 만들어 기억하고 있다.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는 오후 6시를 기해 전두환 독재정권에 대한 민중항쟁의 뜻으로 차를 세워서 경적을 울려줄것울려줄 것 또는 흰 손수건을 흔들어 달라고 지침을 내리어 택시운전수들의[[택시]]운전노동자들의 경적소리와 시내버스에서[[시내버스]]에서 흰 손수건을 흔드는 시민들이 줄을 이었다.
 
여고생들은 민중항쟁 참여자에게 마실 [[물]]과 [[도시락]]을 가져다 주는 등의 적극적인 참여와 지원을 하여 서울도심에서 민중항쟁이 진행될 수 있었고, 특히 명동성당 농성 당시 성당 옆 [[계성여고]] 등에서 도시락과 물 등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농성이 진행될 수 있었다. 당시 [[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에서는 [[감사성찬례]](성공회 미사)때 [[피아노]]를 연주할 [[전례]] 봉사자가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관계자가 [[경찰]]의 감시를 피해 교회안에성공회 대성당안에 들어올 수 있도록 배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했다.
 
=== [[6월 11일]] ===
110번째 줄:
시위가 계속되는 가운데, 정부와 [[민주정의당|여당]]은 당정회의를 잇달아 열어서 6.10 대회 이후에 계속되고 있는 시위 사태에 대처 방안을 논의하였으며, 사회혼란 행위에 대해서는 강력히 대응하기로 결정했다.<ref>{{웹 인용 |url =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791703_6035.html|제목 = [명동시위]고위시국대책회의, 시위 대책 논의[김석진]|저자 = MBC뉴스데스크|날짜 = 1987년 6월 13일|확인날짜 = 2013년 7월 9일}}</ref>
 
한편 명동성당은[[명동성당]]은 별다른 충돌 없이 결혼식과[[혼인성사|혼배성사]]와 미사가[[미사]]가 예정대로 열리는 등 평화로운 모습을 보였지만 팽팽한 긴장은 계속되었다.<ref name="ReferenceC">{{웹 인용 |url =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791707_6035.html|제목 = [명동시위]명동성당 농성 나흘째, 결혼식 및 미사 거행[정태성]|저자 = MBC뉴스데스크|날짜 = 1987년 6월 13일|확인날짜 = 2013년 7월 9일}}</ref> 성당을 점거하고 있는 350여 명의 시위 농성자들은 오전 9시와 11시 50분 두 차례에 걸쳐 경찰저지선 50m앞까지 진출해 반정부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ref name="ReferenceC"/> 하지만 농성자들이 돌이나 화염병을 던지지 않았고, 경찰도 최루탄을 쏘지 않아 서로가 자제하는 모습이 역력했다.<ref name="ReferenceC"/> 평화적인 모습이 계속되었으나 점거학생들은 이번 사건과 관련해 연행, 구속된 사람들이 전원 석방될 때까지 농성을 계속하겠다고 밝혔고, 오후 2시부터는 서울지역 200여 명의 사제천주교 신부들이사제들이 이번 사태와 관련해 대책회의를 열고 학생들을 지지하고 보호하겠다는 전날의 성명을 재확인했다.<ref name="ReferenceC"/>
 
=== [[6월 14일]] ===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는 학생들은 오전 한때 성당 입구 밖으로 나와서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으나 10시 20분 이후부터는 문화관 대강당에서 시국 토론회를 가졌으며 신도들은 오전 7시 미사를 비롯해서 예정된 휴일 미사에 참가했다.<ref name="박광온1">{{웹 인용 |url =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791738_6035.html|제목 = [명동시위]명동성당 점거농성 5일째,명동 일대 산발시위[박광온]|저자 = MBC뉴스|날짜 = 1987년 6월 14일|확인날짜 = 2013년 7월 9일}}</ref> 오전, 오후 미사가 끝난 뒤에 성당 광장에서 한때 연좌시위가 있었으나 충돌없이 곧 해산했다.<ref name="박광온1"/>
 
그 날 오후 명동성당 주변에 모여든 서울시내 대학생 2000여 명은 상업은행 본점, 롯데쇼핑, 사보이 호텔, 중앙극장 그리고 퍼시픽 호텔 앞 등 명동 일대에서 산발적인 시위를 벌였다.<ref name="박광온1"/> 그러나 경찰은 최루탄 발사를 자제했으며, 시위대 역시 돌과 화염병을 던지지 않아 이전과 같은 격렬한 시위 양상은 없었다.<ref name="박광온1"/> 김병도 명동성당 주임 신부는 성명을 낸 뒤, '민주화를 위한 학생들의 노력에 성원을 보내지만, 교회가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모든 부분에서 학생들과 뜻을 같이할 수 없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직장과 학교 그리고 가정으로 돌아가 달라'라고 권고했다.<ref name="박광온1"/>
 
=== [[6월 15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