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노키 마사시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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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몬=Kikusui.jpg
|가몬설명=
|시대=[[가마쿠라 시대]] ~ [[남북조난보쿠초 시대 (일본)|남북조 시대]]
|출생=불명<ref name="h">[[에도 시대]] [[라이 산요]](頼山陽)가 그의 저서《[[일본외사]](日本外史)》에서 [[에이닌]] 2년([[1294년]]) 생으로 추측해 향년 43세로 언급한 것이 후세에 관용처럼 인용되고 있다.</ref>
|사망=[[겐무]] 3년 5월 25일([[1336년]] [[7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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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구스노키 마사쓰라]]<br />[[구스노키 마사토키]]<br />[[구스노키 마사노리]]
|}}
'''구스노키 마사시게'''({{llang|ja|楠木正成}} ?<ref name = "h"/> ~ [[1336년]] [[7월 4일]])는 [[가마쿠라 시대]] 말기부터 [[남북조난보쿠초 시대 (일본)|남북조(南北朝) 시대]]까지 활약한 가와치(河内)의 무장이다. [[가마쿠라 막부]]로부터 악당(惡堂)이라 불리며, [[고다이고 천황|고다이고(後醍醐) 천황]]의 막부 타도에 동참하였다. [[메이지 유신]] 후, 재평가되어 [[1880년]] 정1위에 추증되었다. 가마쿠라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이 친정을 실시한 뒤, 천황을 도와 막부 타도에 동참했던 [[아시카가 다카우지|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가 천황을 등지고 다시 막부를 세우려 하자 그와 대립해 끝까지 황실의 편에 서서 싸우다 미나토(湊) 강의 싸움에서 패하고 자결하였다.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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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usunoki Masashige statue.jpg|thumb|[[황거외원]]에 있는 구스노키 마사시게상]]
[[파일:Minatogawa Jinja(the front of the main shrine).jpg|200px|left|thumb|미나토가와 신사]]
남조의 시각에서 [[남북조난보쿠초 시대 (일본)|남북조 시대]]를 그린 고전 《태평기(太平記)》에는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공적을 유난히 강조해 서술하였고, 아시카가 집안의 사서인 《매송론(梅松論)》에서까지 구스노키는 동정적인 시점에서 서술되고 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전사한 마사시게의 목을 본 다카우지가 "죽고 없다 한들, 가족은 필시 만나고 싶을 게지"라며 그의 목을 정중하게 유족에게 돌려보내는 등, 청렴했던 그에게 보인 다카우지의 경의 때문이기도 했다는 분석이 있다. 또 미나토 강에서 자결할 때까지 아시카가 군과 16번의 전투를 치렀고, 전황이 구스노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던 후반에 다카우지는 구스노키가 그냥 자신에게 투항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잠시 동안 공격을 멈추고 그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는 설이 있다.(이 이야기는 NHK 역사 다큐멘터리 「그때 역사가 움직였다」에서도 인용되었다.)
 
남북조 싸움이 결국 북조측의 승리로 끝나면서 남조측에 가담해 싸우다 죽은 마사시게는 조적(朝敵, 역적)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에이로쿠(永綠) 2년([[1559년]])에 마사시게의 자손이라 칭한 구스노키 마사토라(楠木正虎)가 조정에 헌금하면서 조상에게 씌워진 조적의 이름을 사면해달라는 탄원을 올렸고, 마침내 [[오기마치 천황]]의 명으로 마사시게는 조적의 이름을 벗을 수 있었다. 또 에도 시대에는 [[미토 번|미토(水戶) 번]]에서 융성했던 미토학의 존왕주의 사가들에 의해 마사시게는 충신으로 추대되어 재조명되기 시작한다. 에도 시대 후기에는 존왕가에 의해서 빈번히 그의 제사가 올려졌고, 그 움직임은 후에 미나토가와(湊川) 신사 창건으로 결실을 맺었다. 한편으로 [[야스쿠니 신사|야스쿠니(靖國) 신사]] 등의 초혼사 창건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