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고 (서량):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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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李暠)는 [[오호십육국시대]] [[서량]]의 군주였다.
 
[[후량]] 말기 397년에 후량의 건강태수(建康太守) 단업(段業)이 후량으로부터 자립하여 [[북량]]을 건국했다. 398년 단업이 곽황(敦煌)을 지배하자 곽황의 태수 맹민(孟敏)을 사주자사(沙州刺史)에 임명하고, 동시에 한인 호족의 지지가 두터운 이고를 그의 휘하 교곡현령(效穀県令)으로 임명했다. 얼마안가 맹민이 병으로 죽었기 때문에, 한인 호족으로부터 추대을 받아 이고가 곽황태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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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고는 417년에 병으로 죽었다. 아들 후주(後主) [[이흠]]이 뒤를 계승하였다.
 
당나라 왕조의 황실 이씨는 그의 자손을 칭하는 것이기 때문에, 당나라 때 성립된 진서에서는 휘을 피하고 "이현성"이라고 기술하였다. 허나, 당나라의 이씨는 정확하게 말하자면 선비계의 대부분이 한족화된 씨족이었기에 이고와는 혈연관계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어떤 설에서는 이고의 자손이 [[북위]]에게 멸망당한 뒤, 어떤 일이 특별한 계기가 되어 서량 이씨는 북위의 비호을 받아 이후에도 계속되었다고 한다. 신당서에 의하면 후세 당나라의 저명한 시인인 [[이백]]은 이고의 9대째 직계라고도 한다.
 
[[분류:량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