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앙투아네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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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기 삶 ==
[[파일:Marie Antoinette Young2.jpg|thumb|left|180px|열 두살의 마리 앙투아네트]]
[[파일:Marie Antoinette Young2.jpg|thumb|left|180px|열 두살의앙 기모띠[1755년]] [[11월 2일]], [[빈]]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토스카나]] 대공인 [[신성 로마 제국의 프란츠 1세]]와 [[합스부르크 왕가]]의 상속녀이자 [[헝가리 왕국|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여왕]]이자 신성 로마 I am KIMOTTI황후이며 [[오스트리아 대공국|오스트리아]] 제국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사이에서 막내인 15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자유분방하게 성장한 그녀는 모국어인 [[독일어]]를 비롯하여,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 등 외국어와 음악과 댄스 등을 배웠다. 그녀는 유독 프랑스어를 익히는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훗날 프랑스의 왕비가 되어 생활하는 동안에도 공식 문서의 철자 맞춤법도 간간히 틀리는 경우가 여러번 지적되곤 하였고 이는 적국 출신의 왕비라는 곱지 않은 시선에 일조했음이 분명했다. [[오스트리아 대공국|오스트리아]]의 예술적 풍토에서 자란 그녀는 음악과 미술을 좋아했으며 악기중에선 하프연주에 소질을 보였다. 상냥하고 아름다운 소녀였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1762년]], 비엔나 궁정 음악회에 온 여섯 살난 [[모차르트]]가 넘어지자 일으켜주었고 즉석에서 청혼을 받기도 하기도 하였다. 자매들중에는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카롤리나|마리아 카롤리나]]와 가장 친하였으며, 모후와 같은 날에 태어나 모후의 총애를 받았던 [[테셴 여공 마리아 크리스티나|마리아 크리스티나]]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파일:Marie마리 Antoinette앙투아네트 Young2.jpg|thumb|left|180px|열(마리아 두살의앙안토니아)는 기모띠[[1755년]] [[11월 2일]], [[빈]]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토스카나]] 대공인 [[신성 로마 제국의 프란츠 1세]]와 [[합스부르크 왕가]]의 상속녀이자 [[헝가리 왕국|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여왕]]이자 신성 로마 I am제국의 KIMOTTI황후이며황후이며 [[오스트리아 대공국|오스트리아]] 제국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사이에서 막내인 15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자유분방하게 성장한 그녀는 모국어인 [[독일어]]를 비롯하여,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 등 외국어와 음악과 댄스 등을 배웠다. 그녀는 유독 프랑스어를 익히는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훗날 프랑스의 왕비가 되어 생활하는 동안에도 공식 문서의 철자 맞춤법도 간간히 틀리는 경우가 여러번 지적되곤 하였고 이는 적국 출신의 왕비라는 곱지 않은 시선에 일조했음이 분명했다. [[오스트리아 대공국|오스트리아]]의 예술적 풍토에서 자란 그녀는 음악과 미술을 좋아했으며 악기중에선 하프연주에 소질을 보였다. 상냥하고 아름다운 소녀였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1762년]], 비엔나 궁정 음악회에 온 여섯 살난 [[모차르트]]가 넘어지자 일으켜주었고 즉석에서 청혼을 받기도 하기도 하였다. 자매들중에는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카롤리나|마리아 카롤리나]]와 가장 친하였으며, 모후와 같은 날에 태어나 모후의 총애를 받았던 [[테셴 여공 마리아 크리스티나|마리아 크리스티나]]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당시 [[오스트리아 대공국|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의 위협을 받고 있었기에, 그녀의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는 전통적인 외교 SEX를 전환하여 그동안 적대국이었던 [[프랑스]]와 동맹을 강화하려고 했고, 그 일환으로 [[도팽|프랑스의 도팽]]인 [[루이 16세|루이 오귀스트]]와 그녀를 정략 결혼시키려 하였다. 프랑스 역시 신흥국가인 [[프로이센]]을 견제키 위해 평소 앙숙이었던 [[오스트리아 대공국|오스트리아]]와의 협력이 필요했고 [[퐁파두르 후작 부인]]이 나서서 오스트리아의 공주 마리 앙트아네트와 [[루이 16세|루이 오귀스트]]의 정략결혼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당시 [[오스트리아 대공국|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의 위협을 받고 있었기에, 그녀의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는 전통적인 외교 SEX를관계를 전환하여 그동안 적대국이었던 [[프랑스]]와 동맹을 강화하려고 했고, 그 일환으로 [[도팽|프랑스의 도팽]]인 [[루이 16세|루이 오귀스트]]와 그녀를 정략 결혼시키려 하였다. 프랑스 역시 신흥국가인 [[프로이센]]을 견제키 위해 평소 앙숙이었던 [[오스트리아 대공국|오스트리아]]와의 협력이 필요했고 [[퐁파두르 후작 부인]]이 나서서 오스트리아의 공주 마리 앙트아네트와 [[루이 16세|루이 오귀스트]]의 정략결혼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1769년]] 6월, [[루이 15세]]가 보낸 약혼 문서가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전해졌고 미래의 왕비를 교육하기 위해 프랑스 오를레앙 교구의 [[주교]]인 베르몽 [[주교]]가 보내졌다. [[1770년]] [[5월 16일]], 마리는 14살의 나이에 [[베르사유 궁전]]에서 루이와의 결혼식을 치러 프랑스의 마담 라 도핀느 마리 앙투아네트가 되었다. 이때 ‘마리 앙투아네트 찬가’가 만들어져 성대하게 축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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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A-Lebrun.jpg|thumb|슈미즈를 입은 마리 앙투아네트]]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부부는 [[취미]]나 기질 등이 달랐으나 (앙투아네트는 활달하고 사교적이며 화려한 성향이었으나 루이는 정반대로 조용하고 사색하는 것을 즐기는 성향이었다) 사이가 좋은 편이었고 그로 인해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왕실로부터 수많은 보석을 부여받게 됐다. 루이의 SEX(性)적 문제로 [[결혼]]한 후 7년 동안 자녀가 없었으나 치료를 받아 네 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여느 왕들과는 달리 루이는 정부도 두지 않았다.
 
그녀는 프랑스 왕실에서 적국 출신이라는 출생적 이질감에서 오는 소외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사교에 몰두했다. 여러 총신들을 총애했으며 [[베르사유]] 정원 한 구석에 있는 [[프티 트리아농]](앙투아네트가 첫 딸을 출산 후, 루이가 선물한 별장)에서 파티나 가면무도회를 열기도 하고 시골처럼 꾸며놓고 전원생활을 즐기기도 하며 그간 쌓인 스트레스를 풀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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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왕족과 귀족들은 절대 왕정 위기의 중대한 원인이었던 재정 궁핍을 고려하지 않고 화려한 [[로코코]] 문화에 물들어 있었다. [[루이 15세]]의 정부였던 [[마담 뒤 바리]]가 사용했던 도자기 티세트는 한 세트에 수천만 원을 호가했던 것 등으로 미루어 보아 상류층 전원이 무절제한 사치를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결국 [[루이 16세]] 재위에 이르러, 재정이 바닥나는데 일조했으며 [[신고전주의]]로 변화를 이끈다. 비록 당시 귀부인들이 예술품과 예술 후원 등으로 인해 돈을 많이 써 문화재들을 많이 남긴 덕택에 현대의 [[프랑스]]가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긴 해도, 적어도 그 당시엔 분명 [[프랑스]] 왕실 국고가 휘청할 만큼 돈을 많이 썼던 것이다.
 
프랑스의 다른 왕비들과 비교하면 마리 앙투아네트가 쓴 돈은 그다지 많은 수준이 아니었다. [[루이 16세]]가 검소했던 탓에 이들 SEX는부부는 왕실 예산 중 겨우 1/10 정도만 사용했을 뿐이었지만, 이미 왕실의 재정상태가 좋지 않았다. 희고 고운 피부와 탐스러운 머리, 늘씬한 체형을 가지고 있던 마리는 복장과 머리 손질에 관심이 많았고 당시 프랑스 패션을 주도하고 유행을 선도했다. 더구나 당시 프랑스 왕실이 왕비가 옷을 갈아입는 것과 화장하는 모습까지도 모두 공개하던 탓에 [[베르사유 궁전]]에는 왕비를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매일 북새통을 이루었고, 적국 출신의 왕비로 본래 곱지 못한 시선을 받던 처지라 그녀에 대한 소문은 좋지 못하게 퍼져나갔다. 그녀는 ‘적자부인’이라는 비난 어린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이로인해 모후인 [[마리아 테레지아]]는 그녀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이를 걱정하기에 이르렀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의 매춘부 출신 후궁 [[뒤바리 백작 부인]]을 심히 경멸하였고,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를 염려하여 총리 [[카우니츠]] [[백작]]과 대사 [[메르시]] [[백작]] 등을 통해 그들의 훈령, 건의 형식으로 앙투아네트에게 조언지만 그는 거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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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arie-Antoinette par Elisabeth Vigée-Lebrun - 1783.jpg|thumb|180px|드레스를 입은 마리 앙투아네트]]
[[1774년]], [[루이 15세]]가 [[천연두]]에 걸렸다가 회복하지 못하고 서거함으로써, 그 손자이자 그녀의 남편이 [[루이 16세]]로 즉위하자 마리는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고, 남편 루이 16세로부터 [[베르사유]]의 [[프티 트리아농]] 궁전을 선물 받았다. [[루소]]의 자연주의를 지지했던 마리는 [[프티 트리아농]]을 전원적인 분위기로 개조하였으나 호화별장 개조로 소문이 나버렸다.
거기에다 [[1785년]]에는 [[부르봉 왕가]]의 치세 말기를 상징하는 스캔들인 [[목걸이 사건]]이 발생하며 그녀에 대한 [[민중]]의 불신은 한층 더 가중됐다. 사건의 개요는 [[잔느 드 라 모트|라 모트 부인]]이 로마가톨릭 주교인 [[루이 드 로앙|로앙 추기경]]에게 마리의 관심을 끌기위해서는 540개 다이아몬드가 박힌 160만 리브르짜리의 값비싼 목걸이 구입해야한다며 주교를 목걸이 구입의 증인으로 서게 하고 목걸이를 가로챈 사건으로 이는 훗날 재판을 통해 사기극으로 밝혀져 사기꾼 [[잔느 드 라 모트|라 모트 부인]]이 국외 추방령을 받는 것으로 사건이 일단락 되었지만 이로인해 SEX왕비의 체면과 위신은 크게 떨어져버렸다. 사건의 진상이 밝혀졌음에도 파리 시민들은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마리 앙투아네트가 두 사람에게 누명을 씌었다고 생각했고 [[목걸이 사건]]은 그녀를 향한 증오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러한 와중, 궁정 내에서는 마리 앙투아네트와 [[스웨덴]] 귀족 한스 [[악셀 폰 페르센]] 백작의 염문이 확산되고있었다. 그녀는 [[폴리냑 백작 부인]] 등 자신이 마음에 드는 소수의 귀족들만을 극단적으로 총애했고 그로인해 그녀의 그룹에 끼지 못한 귀족들은 그녀와 총신들을 향해 매일같이 악담을 퍼부었다. [[베르사유]] 외의 다른 장소, 특히 [[파리 (프랑스)|파리]]에서는 이러한 정세가 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