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영종 (9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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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무종 [[카이산]]은 즉위 당시 경쟁 세력인 안서왕(安西王) 아난다(阿難答)를 제압했던 동생 인종의 공로를 치하하며 황태자로 삼아 후계를 보장한 한편 인종이 조카에게 제위를 넘겨준다는 소위 '무인수수(武仁授受)'의 약조를 한 바 있었다. 그러나 무종 사후에 그의 아들인 [[쿠살라]]는 황실의 냉대를 받다가 연우 4년([[1317년]]) 운남으로 유배당하던 도중 섬서에서 반란을 일으킨 사건에 연루되어 중앙아시아로 도주했고, 그를 지지한 장교단 역시 숙청당했다.
 
시데발라에게 제위가 돌아가게 된 배경엔 흥성태후와 그녀를 보좌한 테무데르 일파의 책동이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는데, 이는 무종계 세력을 배척하는 동시에 시디발라의시데발라의 모친이 태후와 같은 [[온기라트|훈기라드]] 씨족이었던 만큼, 어리고 유약한 후계자를 조종하기 수월할 것이란 계산이 고려되었기 때문이다. 본래 시데발라는 자신을 태자로 세우려는 흥성태후에게 스스로 어리고 능력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대통은 쿠살라가 이어받아야 마땅하고, 그를 보좌하겠다며 고사했으나, 결국 태후의 의지대로 관철되었다. 책립 후 중서령 및 추밀사를 겸임했고, 곧바로 연우 4년 윤정월엔 시데발라의 책봉 조서가 공표되었다.
 
연우 7년([[1320년]]) 정월, 인종이 붕어하자 시데발라는 즉위에 앞서 선제(先帝)의 상(喪)을 주관하게 되었다. 이 공백기를 틈타 흥성태후는 테무데르를 중서우승상으로 복직시키고, 중서성 인사에 대한 물갈이를 통해 조정의 대권을 장악하고자 기도하였다. 같은 해 3월 11일, [[대도]]의 대명전(大明殿)에서 즉위한 영종은 다음달에 [[칭기즈 칸]]의 원훈 [[무칼리]]의 후손으로 태자 시절부터 교유해왔던 바이주(拜住)를 중서평장정사(中書平章政事)로 기용한 데 이어서 중서좌승상으로 승진시키면서 테무데르의 전횡을 견제하고, 태후 직속 기관인 휘정원(徽政院)에 압력을 가하는 등 실권 회복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지치 2년[[1322년]] 흥성태후와 테무데르의 죽음은 그가 집권하게 하였다. 그는 [[온기라트|훈기라드]] 족을 새 행정부에서 구동하려고 하였다.
 
지치 3년[[1323년]] 8월, 그가 [[상도 (지명)|상도]]의 여름궁에서 대도의 겨울궁으로 이동하다가 남파(南波)에 머물 때 영종과 바이주는 테무데르의 양자 테그시에 의해 암살되었는데 그는 아수드 위병과 그의 부하인 다른 군인들과 함께 대칸의 오르도를 공격하였다.([[:zh:南坡之变|남파의 변]], [[1323년]])
 
테그시는 [[예순테무르]]에게 왕좌에 오를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예순테무르는 테그시 파를 숙청하였고 그것은 [[대도]]에 들어가기 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