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영종 (9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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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 7년([[1320년]]) 정월, 인종이 붕어하자 시데발라는 즉위에 앞서 선제(先帝)의 상(喪)을 주관하게 되었다. 이 공백기를 틈타 흥성태후는 테무데르를 중서우승상으로 복직시키고, 중서성 인사에 대한 물갈이를 통해 조정의 대권을 장악하고자 기도하였다. 같은 해 3월 11일, [[대도]]의 대명전(大明殿)에서 즉위한 영종은 다음달에 [[칭기즈 칸]]의 원훈 [[무칼리]]의 후손으로 태자 시절부터 교유해왔던 바이주(拜住)를 중서평장정사(中書平章政事)로 기용한 데 이어서 중서좌승상으로 승진시키면서 테무데르의 전횡을 견제하고, 태후 직속 기관인 휘정원(徽政院)에 압력을 가하는 등 실권 회복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즉위 초기부터 조정의조정내의 인사 이동 문제를 둘러싼 새 황제와 흥성태후 사이에 신경전이 고조된 가운데 연우 7년 5월, 영북행성의 평장정사 아산(阿散)과 중서평장정사 흑려(黑驢), 휘정사(徽政使) 시레문(失列門) 등 태후 세력과 가까운 인사들이 주동한 폐립 모의가 발각되었다. 이 음모는 케식 군단을 신속히 동원해 선수를 치고 나온 영종과 바이주에 의해 분쇄되었으며, 정치적 입지가 위축된 흥성태후가 별궁으로 퇴거한 것을 계기로 체제 단속이 진행되는 가운데진행되었고, 휘정원을 배경삼아 아성을 구축해왔던 훈기라트파에 대해 일련의 탄압이 가해졌다.
 
지치 2년([[1322년]]) 흥성태후와 테무데르의 죽음은 그가 집권하게 하였다. 그는 [[온기라트|훈기라드]] 족을 새 행정부에서 구동하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