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나라: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태그: m 모바일 웹 |
편집 요약 없음 태그: m 모바일 웹 |
||
36번째 줄:
== 역사 ==
금나라 건국 이전에 [[여진족]]들은 지금의 [[만주]] [[헤이룽장 성]]에 거주하던 [[말갈족]]이었다. 당시 말갈족은 [[읍루]]의 후손으로 추측되고, 금나라 멸망후
금나라의 황제들의 조상은
여진족은 [[요나라]]의 지배를 받으며, 하얼빈 동남쪽에 있었던 완안부를 중심으로 세력을 키웠다. 이후 완안부의 추장
[[1142년]]에 [[금 희종|희종]]은 남송과 조약을 체결했다. 그 조약에 따르면, 남송은 해마다 금나라에 세폐를 주고, 금의 황제는 송의 황제를 신하로 삼았다. 상경회령부에서 [[중도 (금나라)|중도대흥부]](지금의 [[베이징]])로 옮기고 수많은 여진인을 화베이로 이주시켰다. 해릉왕은 종실 내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남송을 침공해서 통일 중국의 황제가 되려고 했다. 그러나 강제 징병에 시달리던 거란족이 반란을 일으킨 틈을 타 종실 내 반대 세력이 랴오양에서 오록(烏祿, [[금 세종|세종]])을 황제로 옹립했다. 세종은 남송과 국교를 회복하고 거란족의 반란을 진압하는 등 대내외의 안정을 회복했다. 그리고 관리를 숙정하고 긴축 재정을 운용해 정치·사회의 안정을 이룩했으며, 남송과 평화를 유지해 금나라 제일의 명군이 되었다. 또한 몰락하는 맹안·모극 호를 보호하고, 여진어 사용을 장려하며, 여진족의 풍습을 보호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