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광역시의 역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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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회사령을 발표하여 조선에 일본 자본을 유치하고자 하였다. 일본은 저임금 구조를 유지하는 가운데 노동집약적인 산업을 조선에 유치하였는데, 총독부는 “조선 산업정책의 기본은 본국인 일본 제국의 산업정책과 관련하여 협조”하는 것으로 보아 일본의 산업 구조를 보완하는 정책을 폈다. 이 때문에 노동자를 보호하는 정책은 기대할 수 없었고, 노동자의 요구는 철저히 억제되어야 하였다. 1920년대 조선총독부 산업조사위원회 위원 가타 나오하루(賀田直治)는 일본 자본의 투자 유치를 이끌어 내기 위해 조선인 노동자의 장점으로 임금이 저렴하며, 언어습득이 빠르고, 파업을 일으킬 능력이 부족하고, 일본 공장법의 범위 밖에 있으므로 하등의 지장 없이 일을 시킬 수 있다는 것 등을 들었다.<ref>이상의, 《일제하 조선의 노동정책 연구》, 혜안, 2006년, {{ISBN|89-8494-272-3}}, 54쪽</ref>
 
노동자들도 점차 자각이 이루어져 1920년대에 들어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20년 4월 서울에서 최초의 대중적 노동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가 조직된 직후, 인천에서도 1920년 6월 29일 조선노동공제회 인천지회가 창립되었다. 1920년대 초 인천지역에서는 노동야학운동이 왕성했다.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이[[조선노농총동맹]]이 설립된 이후 인천에는 인천선미여공조합, 하역인부조합, 정미직공조합, 인천철공조합, 인천목공조합, 양랍직공조합 등의 노동조합들이 설립되었다. 이들은 야학과 토론을 거치며 노동운동을 발전시켜 나갔다. 노동법이 없었던 식민지 상황에서 노동자단체에 의한 파업투쟁의 커다란 특성은 교섭단체로서 노동조합의 승인을 둘러싸고 발생한 것이 많다는 것이다. 고용주는 노동조건에 대해 노동조합과 협의하기를 거부했다. 그리고 노동조합은 종래의 열악한 노동조건과 가혹한 노동관행에 반발해 축적된 힘을 바탕으로 노동단체가 실질적인 교섭력을 행사하려고 했다.<ref name="기호일보080609">[http://www.kiho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295322 일제강점기 인천의 사회운동과 노동운동], 기호일보, 2008년 06월 09일</ref>
 
1890년 이후 인천의 대표적인 수출품은 쌀이었으며 인천에는 대규모 정미소가 들어섰다. 인천에서 정미되어 수출된 쌀은 오사카 등지에 공급되었다. 정미소는 대부분 일본인에 의해 경영되었으며, 조선인 노동자들은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며 일하여야 하였다. 1925년 당시 인천가등정미소<ref group="주해">가등정미소는 일제시기 대표적인 대규모 정미소로 친일파 [[이종섭]] 등이 임원을 역임하였다.</ref> 선미 여공은 하루 12시간의 노동에 최저 35전에서 최고 65전의 임금을 받았다.<ref name="조우성189191">{{harvnb|조우성|2004|p=189-191}}</ref> 1925년 서울 지역 조선인 석공 노동자의 평균 임금은 2월 50전, 일본인 석공은 4원 20전이었던 것<ref>김이순, 《대한제국 황제층》, 소와당, 2010년, {{ISBN|8993820171}}, 238쪽</ref> 에 비교하면 극악한 저임금이었다. 당시 쌀 한 가마의 가격은 40원이었다.<ref>[https://search.i815.or.kr/Degae/DegaeView.jsp?nid=903 1930년대 농민운동], 독립기념관</ref> 1924년부터 정미소 여공들은 임금 인상과 수시로 벌어지는 성희롱 방지를 요구하며 파업을 벌이기 시작하였고, 1926년 3월 23일 9개 정미소 직공 3천여명이 총파업을 벌였다. 이들은 임금 인상, 구타 방지, 부당 해고 금지, 8시간 노동, 대우개선 등을 요구하여 파업을 벌여 승리하였다.<ref name="조우성18919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