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웅: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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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고흥군]]에서 태어났다. [[1946년]] [[전라남도지사]] [[서민호]]와 함께 [[조선대학교]] 설립을 주도하였다.<ref>[http://www.unn.net/u_jong_story/story_contents.asp?key=49&pageTitle=%EC%97%B0%EC%9E%AC%EA%B8%B0%ED%9A%8Dv 〈김우종의 대학비사:(25) 박철웅의 꿈과 야망, 그리고 조선대〉《한국대학신문》] </ref> 박철웅은 조선대학교 1, 4, 7대 총장을 역임하면서 점차 독단적으로 대학을 운영하여 마찰을 빚었는데 이러한 약점을 기화로 1980년 8월 신군부의 국가보위상임위원회 시절 광주보안대에 부인 정애리시와 함께 끌려가 학교운영권을 박탈당하게 된다. 1982년 11월에야 조선대 이사장 복귀가 허락되었으나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으로 많은 사립대학들이 시위사태에 휘말릴때 조선대학도 NLL(민족해방)계열의 운동권학생들이 박철웅총장및 이사진의 퇴진을 요구하며 장기농성에 들어갔다. 결국 [[1987년]] [[12월]] 박철웅은 총장직에서 물러났다. [[1999년]] [[1월 8일]] 자택인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동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이하의 내용은 개인의 관점이 반영되었음)
박철웅은 87년쯤 총장직을 내려놓았다. 재직시절 일화로, 거의 매일 아침 교직원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구보를 시켰다. 총장직에서 물러난 마지막 사건은 70대 노인인 조대병원장의 정강이를 구두 발로 찼고 이에 의대 교수진이 집단 사표를 내면서 학내 민주화로 번지게 되었던 것이다.
 
== 약력 ==
* [[1929년]] [[11월]] 광주학생독립운동사건이 일어나자 당시 [[전주신흥고등학교|전주 신흥학교]] 3학년이었던 박철웅은 [[12월10일]] 이철(李哲), 원용덕(元龍德)과 함께 100여명이 [[전주신흥고등학교|신흥학교]]의 시위를 주동한 까닭으로 구류 29일을 전주형무소에서 보냈음.
* 일본 [[메이지 대학]] 정경학부졸업
* 조선대학부속중학교 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