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크 루소: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태그: m 모바일 웹
태그: m 모바일 웹
26번째 줄:
 
=== 프랑스에서의 활동 ===
[[1728년]] [[제네바]]에 우연히 들른 루소는 환대를 받지 못하고, [[이탈리아]]의 [[토리노]]로 발길을 돌려 그 곳에서 [[로마 가톨릭]] [[세례]]를 받았으며, 장 조세프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여기서 루소는 드 베르셀리(de Vercellis) 부인의 시종과 구봉 백작의 서기를 겸직했다. 바랑 [[남작]] 부인의 후원으로 신학교에 들어갔으나 [[사제]]가 될 의향이 없어 신학 공부를 포기하고 르 메트르의 지도하에 음악을 공부한다. 1730년 로잔으로 이주하여 가명으로 음악사 생활을 했다. 다음 해 루소는 처음으로 [[파리 시|파리]]를 방문한 후 [[리옹]]을 거쳐 샹베리 등지에서 생활했다. 1732년부터 1740년까지 샹베리와 샤르메트에서 바랑 부인 곁에 살면서 음악에 몰두하고, 많은 독서를 하며 다방면에 걸쳐 교양을 쌓는다. [[1741년]] [[계몽주의|계몽주의자]]인 [[달랑베르]], [[디드로]]와 [[파리 (프랑스)|파리]]에서 만나 친분을친교를 맺었다. 1742년 새로운 악보 표기법을 정리하고, 파리로 가서 그것을 아카데미에서 발표하지만 기대했던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1743년 (''Dissertation sur la musique moderne'')이 출판된 후 [[베네치아]]로 이주하여, 몽테귀 백작의 서기직을 맡지만 1년도 채 못 되어 백작과 의견이 맞지 않아 사퇴하고 파리로 돌아왔다.
 
=== 결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