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녕대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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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은 성억의 딸이다. 후에 셋째형인 [[조선 세종대왕|세종]](충녕대군)이 즉위한후, 세종의 셋째아들 [[안평대군]]이 양자로 들어 왔다.
 
=== 사후 ===
그러나 안평대군은 [[1453년]](단종 1) [[계유정난]]에 연루되어 강화도로 귀양갔다가 그 해 [[10월 19일]] 안평대군 일가가 화를 입어 멸문당하고 대군의 부인 성씨 또한 그해 [[10월 22일]] [[경주시|경상도 경주]]로 귀양가 폐출(廢黜, 지위나 작위, 관직을 몰수하고 내침)되었다. 성녕대군의 부인 성씨도 연좌되어 [[1453년]](단종 1) [[10월 19일]] 원방에 유배하라는 명을 받고 [[경상도]] [[경주]]로 유배되었다가 [[1456년]](세조 2년) [[7월 7일]] 특명으로 석방되었다.
 
[[1459년]](세조 4)에 종부시(宗簿寺)에서 대군가가 대(代)가 끊기어 제사봉행을 못하고 있으므로 [[효령대군]]의 6남 원천군(原川君) 의(宜)를 양자로 들여 봉사하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