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조 (조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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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가 약내를 맡고는 이런 저런 흠을 잡아 면박을 주며 물리치자 세자는 밖에 우두커니 서서 미동도 하지 아니했다. 이에 신하들이 병석의 영조에게 약을 권할 것을 종용하자 이를 거절하고 이것으로 둘째 세손의 탄생으로 인한 화해의 기미는 날라가고 만다.<ref name="daum1"/> 세자는 영조가 약을 물리치는 것이 자신의 허물 때문이므로 약을 권할 면목조차 없다고 했으나, 영조는 그런 꾸짖음 하나 못 받느냐며 몹시 기분이 상했다.<ref name="daum1"/>{{출처|날짜=2014-02-26}}
 
==== 영조와의영조, 노론과의 심각한 갈등갈등과 정신질환 ====
[[파일:Letter of Crown prince Sado of Joseon.jpg|thumb|left|150px|장조가 장인 [[홍봉한]]에게 보낸 편지 ([[1750년]])]]
[[파일:Crown Prince Sado of Joseon 1.jpg|thumb|left|150px|장조가 장인 [[홍봉한]]에게 보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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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장인 [[홍봉한]]에게 보냈던 편지들 중에는 우울증을 호소하는 대목도 나온다. 1756년 2월 29일, 사도세자는 “나는 한 가지 병이 깊어서 나을 기약이 없으니, 다만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민망해할 따름입니다”라고 썼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6년 전 고백이다. 편지에는 아버지 영조에 대한 불만도 자세히 기록돼 있다. 사도세자는 만 14세인 1749년 장인에게 쓴 편지에서 “내 나이 올해로 이미 15세의 봄을 넘긴 지 오래되었습니다만 아직 한번도 숙종대왕의 능에 나아가 참배하지 못했습니다”라고 적었다.<ref name="dyletter"/> 여기에 대해서는'사도세자는 숙종대왕의 능에 참배하지 못하니 자신이 세자인지 자격지심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는 견해가 있다. 아버지의 갈등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대목이라는 게 학계의 설명이다.<ref name="dyletter"/>
 
[[노론]]의 대신들 역시 그의 실수와 비행을 영조에게 고해 바쳤다. [[정성왕후]] 생존에는 유화적이었지만, [[정성왕후]]가 죽은 후에는 영조와의 갈등이 더욱 깊어졌다. 세자궁에 있던 관료 조유진은 형수이기도 한 [[효순왕후|효순 현빈]]의 친정 조카였는데 사도세자는 그를 통해 자신의 형수의 동기간인 [[조재호 (조선)|조재호]]와 연결, 서신을 주고받게 된다. [[소론]]계열이었던 [[조재호 (조선)|조재호]]는 정순왕후의 책봉에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물러나 [[춘천]]으로 은퇴하였다가 후에 사도세자의 구원요청을 받고 한양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사도세자를 구원하지 못하고 오히려 역공을 당해 사사된다.
한편 사도세자는 영조 즉위의 의리와 명분에 관련된 신임사화에 대해 부왕과는 다른 의견을 내놓아 대립이 심화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이 때 [[김상로]], [[홍계희]], [[문성국]], [[김한구]], [[김귀주]] 등은 그를 수시로 탄핵, 비판하였고, 시댁이 소론 계열이었던 [[화완옹주]] 역시 그를 공격하는데 가담했다고 한다.(하지만 화완옹주가 사도세자를 모함했다는 증거는 명확하지 않아서 추측에 불과하다.) 이에 그를 싫어하는 노론 당원들과 이에 동조하는 [[정순왕후 (조선 영조)|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 金氏), [[숙의 문씨 (영조)|숙의 문씨]](淑儀 文氏) 등이 영조에게 세자를 무고하여 영조가 수시로 불러 크게 꾸짖었다 한다.
한편 [[당색]]으로는 [[노론]]이었던 [[혜경궁 홍씨]] 역시 세자에 대한 정보를 빼내 [[홍봉한]], [[홍인한]] 등에게 제공했다. 도움을 청할 곳이 없었던 사도세자는 형수인 [[효순왕후|효순현빈 조씨]]의 남동생이자, 영조가 탕평파로서 총해하던 [[조문명]]의 아들 [[조재호 (1702년)|조재호]] 등에게 도움을 청했다.
 
==== 난폭한 행동 문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