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화단 운동: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267번째 줄:
=== 인명피해 ===
의화단 운동으로 [[로마 가톨릭교회|로마 가톨릭
<ref>이혜원 《韓中 기독교 관계사 연구》(연세대 신학대학원 석사학위 논문)</ref>
특히, [[동복상]] 장군의 휘하에 있던 감군(甘軍, [[회족]] 군인들)은 집집 마다 돌아다니며 [[기독교]]
=== 기독교탄압의 배경 ===
의화단의 반기독교운동을 구교운동(仇敎運動)이라고 하는데 이 구교운동은 로마 가톨릭교회 등 서양 선교사들의 토지 수탈이 한 원인이었다. 유화실의 《의화단 운동의 일고찰》([[이화여자대학교|이화여대]] 석사학위 논문)을 보면 당시 화북지방의 농민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 신부들이 강제로 땅을 빼앗는 등 수탈에 분노하여 구교운동을 일으켰다고 적고 있다.<ref>유화실의 《의화단 운동의 일고찰》(이화여대 석사학위 논문,P50~59)</ref> 의화단 운동을 구교운동(반기독교운동)의 정점으로 본 일본인 학자 오노 신지(小野信
爾)는 그의 “清末の仇教運動(청말의 구교운동)”이라는 논문에서 "중국 민중들이 이토록 서구 기독교에 적대적 감정을 표출하여 공격한 것은 기독교를 '제국주의 침략의 대표자'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ref>小野信爾, “清末の仇教運動,”『中国文化叢書6 宗教』(東京: 大修館書店, 1967), 270-293</ref> 이 의화단의 반기독교운동은 조선의 [[동학운동]]에도 크게 영향을 끼쳤다.<ref>이혜원 《韓中 기독교 관계사 연구 : 의화단운동이 한국기독교에 미친 영향을 중심으로》(연세대학교 신학대학원 박사 논문)</ref>
279번째 줄:
=== 동남자보선언 ===
[[의화단]]에 대한 토벌과 무마를 중심으로 조정안이 대립되고 있을때 지방의 독무 가운데 '의화단을 토벌하자'는 주장을 하는 이들이 있었다. [[의화단]]이 [[즈리 성]]으로 들어와 소란과 난동을 피울 때인 [[5월 31일]] 호광총독 [[장지동]]은 '이들이 결코 양민이 아니니 법에 따라 주살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양강총독 [[유곤일]]도 [[6월 8일]]에 '마땅히 토벌하여야 하며 한 두 계열만 통쾌하게 토벌하면 나머지 무리들은 자멸한다.'고 하여 철저한 토벌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서태후]]로부터 선전포고 지시를 받았다.<ref name="동남자보">《근대중국:개혁과 혁명-중화제국 마지막 왕조의 몰락(下)》,신승하 저. 대명출판사. p427~p429</ref>
줄 311 ⟶ 309:
그리고 [[1900년]] [[5월 28일]]부터 [[5월 30일]]까지 각 국 공사들은 몇 차례 토의를 거쳐 연합, 출병하여 공동으로 [[의화단]]을 진압하기로 결정한 다음, 우선 [[베이징]]에 있는 '공사관을 보호한다.'는 이름으로 군대를 [[베이징]]으로 불러들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ref name="연합군의 진압"/> 그리하여 청 정부가 제공하는 열차 편으로 [[베이징]]으로 들어왔다. [[1900년]] [[6월 7일]] 전후에 서양 열강의 각 국 정부는 중국 주재 공사들에게 전권을 부여하고 각 국의 중국 주재 함대사령관에게 공사의 명에 따르도록 지시하였다.<ref name="연합군의 진압"/>
각 국 공사는 '400명의 병력으로 공사관을 보호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1900년]] [[6월 10일]]에 영국,프랑스,독일,러시아,미국,일본,이탈리아,오스트리아의 8개국이 연합군을 조직하기로 하여 우선
[[파일:BoxerTroops.jpg|섬네일|260px|right|8개국 연합군 해군과 해군기. (일본의 그림)]]
당시 다구 포대 밖에는 32척의 외국 군함이 정박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6월 17일]] 상륙하여 다구 포대를 점령하고 [[톈진]]으로 향하여 [[7월 14일]] [[톈진]]을 함락시켰다. 이때 연합군은 톈진을 몇 구로 나누어 점령하고 다음 날 [[톈진]] 점령하 관리 문제를 토론하였다. 결국, 러시아, 일본, 영국이 지정한 세 사람이 임시정부를 조직하여 공동으로 행정을 처리하기로 하고, [[7월 22일]]에 열강의 의지를 반영한 식민통치 기구로 '톈진 도통아문'이 정식으로 성립되었다. 이때는 이미 연합군의 숫자가
[[파일:CaptureTianjin.jpg|섬네일|왼쪽|280px|톈진 점령한 연합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