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화단 운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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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명피해 ===
의화단 운동으로 [[로마 가톨릭교회|로마 가톨릭 교회의교회]]의 경우, 5명의 [[주교]]와 31명의 유럽 출신 [[사제]], 9명의 유럽출신 수녀, 2명의 마리아 수도회 수녀 등, 총 47명의 [[선교사]]가 사망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중국인 가톨릭 신도는 대략 3만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개신교는 교세가 훨씬 작았으므로, 피해도 가톨릭에 비해 작았다. 개신교의[[개신교]]의 경우, 가장 피해가 심한 지역은 바오딩푸(保定府)였는데, 그곳에서만 15명의 선교사(미북장로회미북[[장로교|장로회]], 미북감리회미북[[감리교|감리회]], 중국내지선교회([[OMF영국]]의 선교사인 [[허드슨 테일러]]가 조직한 개신교 선교공동체로서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수립 전까지 활동함, [[중국어|중국내지선교회중국사람들과 같은 말]](과 의복, [[중국 요리|음식]]등으로써 중국사람들이 [[기독교]]에 친밀함을 느끼게 하려고 노력했다. 현재 동아시아선교회OMF동아시아선교회 OMF), 미국공리회 소속)가 살해되었다. 사망한 개신교 선교사의 수는 기록에 따라 달리 나타나는데, 성인 선교사의 수는 134명 혹은 135명으로, 어린이는 52명 혹은 53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선교사와 그 가족 사망자 총수는 186명 혹은 188명으로 추정된다. 사망한 중국 개신교인의개신교 신자들의 수는 더욱 불명확 하지만, 대략 1912명으로1,912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ref>이혜원 《韓中 기독교 관계사 연구》(연세대 신학대학원 석사학위 논문)</ref> 정교회의[[동방 정교회|정교회]]의 경우 베이징에 있던 700여명의 [[동방정교회]]신자 가운데 200명에서 400여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살해되었다.
특히, [[동복상]] 장군의 휘하에 있던 감군(甘軍, [[회족]] 군인들)은 집집 마다 돌아다니며 [[기독교]]인들을 색출하여 [[기독교]]인만을 학살하고 다녔는데, 이들은 [[기독교]]로 개종한 중국인들을 '외국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배반자'([[한간]],漢奸)로 여겼다.<ref>Robert B. Edgerton (1997). [http://books.google.com/books?id=wkHyjjbv-yEC&pg=PA70&dq=sugiyama+akira&hl=en&ei=h_3_TLrBCIP88Aar4rnzBw&sa=X&oi=book_result&ct=result&resnum=5&ved=0CDUQ6AEwBDgK#v=onepage&q=provocations%20by%20foreigners&f=false Warriors of the rising sun: a history of the Japanese military. W. W. Norton & Company. p. 70.] {{ISBN|0-393-04085-2}}. Retrieved 2010-11-28.</ref>
 
=== 기독교탄압의 배경 ===
의화단의 반기독교운동을 구교운동(仇敎運動)이라고 하는데 이 구교운동은 로마 가톨릭교회 등 서양 선교사들의 토지 수탈이 한 원인이었다. 유화실의 《의화단 운동의 일고찰》([[이화여자대학교|이화여대]] 석사학위 논문)을 보면 당시 화북지방의 농민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 신부들이 강제로 땅을 빼앗는 등 수탈에 분노하여 구교운동을 일으켰다고 적고 있다.<ref>유화실의 《의화단 운동의 일고찰》(이화여대 석사학위 논문,P50~59)</ref> 의화단 운동을 구교운동(반기독교운동)의 정점으로 본 일본인 학자 오노 신지(小野信
爾)는 그의 “清末の仇教運動(청말의 구교운동)”이라는 논문에서 "중국 민중들이 이토록 서구 기독교에 적대적 감정을 표출하여 공격한 것은 기독교를 '제국주의 침략의 대표자'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ref>小野信爾, “清末の仇教運動,”『中国文化叢書6 宗教』(東京: 大修館書店, 1967), 270-293</ref> 이 의화단의 반기독교운동은 조선의 [[동학운동]]에도 크게 영향을 끼쳤다.<ref>이혜원 《韓中 기독교 관계사 연구 : 의화단운동이 한국기독교에 미친 영향을 중심으로》(연세대학교 신학대학원 박사 논문)</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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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남자보선언 ===
 
==== 의화단 토벌 주장 ====
[[의화단]]에 대한 토벌과 무마를 중심으로 조정안이 대립되고 있을때 지방의 독무 가운데 '의화단을 토벌하자'는 주장을 하는 이들이 있었다. [[의화단]]이 [[즈리 성]]으로 들어와 소란과 난동을 피울 때인 [[5월 31일]] 호광총독 [[장지동]]은 '이들이 결코 양민이 아니니 법에 따라 주살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양강총독 [[유곤일]]도 [[6월 8일]]에 '마땅히 토벌하여야 하며 한 두 계열만 통쾌하게 토벌하면 나머지 무리들은 자멸한다.'고 하여 철저한 토벌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서태후]]로부터 선전포고 지시를 받았다.<ref name="동남자보">《근대중국:개혁과 혁명-중화제국 마지막 왕조의 몰락(下)》,신승하 저. 대명출판사. p427~p429</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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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900년]] [[5월 28일]]부터 [[5월 30일]]까지 각 국 공사들은 몇 차례 토의를 거쳐 연합, 출병하여 공동으로 [[의화단]]을 진압하기로 결정한 다음, 우선 [[베이징]]에 있는 '공사관을 보호한다.'는 이름으로 군대를 [[베이징]]으로 불러들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ref name="연합군의 진압"/> 그리하여 청 정부가 제공하는 열차 편으로 [[베이징]]으로 들어왔다. [[1900년]] [[6월 7일]] 전후에 서양 열강의 각 국 정부는 중국 주재 공사들에게 전권을 부여하고 각 국의 중국 주재 함대사령관에게 공사의 명에 따르도록 지시하였다.<ref name="연합군의 진압"/>
 
각 국 공사는 '400명의 병력으로 공사관을 보호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1900년]] [[6월 10일]]에 영국,프랑스,독일,러시아,미국,일본,이탈리아,오스트리아의 8개국이 연합군을 조직하기로 하여 우선 2129명2,129명(영-915명,독-512명,러-312명,미-111명,일-54명,프-157명,이-42명,오-26명)을 구성, 영국 해군사령관 시모어(E. H. Seymour)의 지휘아래 톈진의 다구 포대로 상륙하여 [[톈진]]을 경유 [[베이징]]으로 들어오게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의화단의 강력한 저지와 청군의 공격을 받아 다수의 사상자를 내고 톈진 [[조계]]로 물러나게 되었다.(이들 8개국 연합군의 사상자 수는 총290명이었다.)
 
[[파일:BoxerTroops.jpg|섬네일|260px|right|8개국 연합군 해군과 해군기. (일본의 그림)]]
당시 다구 포대 밖에는 32척의 외국 군함이 정박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6월 17일]] 상륙하여 다구 포대를 점령하고 [[톈진]]으로 향하여 [[7월 14일]] [[톈진]]을 함락시켰다. 이때 연합군은 톈진을 몇 구로 나누어 점령하고 다음 날 [[톈진]] 점령하 관리 문제를 토론하였다. 결국, 러시아, 일본, 영국이 지정한 세 사람이 임시정부를 조직하여 공동으로 행정을 처리하기로 하고, [[7월 22일]]에 열강의 의지를 반영한 식민통치 기구로 '톈진 도통아문'이 정식으로 성립되었다. 이때는 이미 연합군의 숫자가 11000명으로11,000명으로 늘어났고, 7월 말에는 34000명이34,000명이 되었다.<ref name="연합군의 진압"/>
 
[[파일:CaptureTianjin.jpg|섬네일|왼쪽|280px|톈진 점령한 연합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