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안 김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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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시조 '''김섬한'''(金暹漢)은 신라 [[김알지]]의 후예로, 고려 명종 때 사문박사(四門博士)를 지냈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신라 김알지(金閼智)의 후예인 두 왕자가 왕에게 직간(直諫)을 하다가 형은 북빈경(北濱京 : 지금의 강릉)에, 아우는 시염성(豉鹽城 : 연안의 옛 지명)으로 유배되었는데, 아우의 후손이 바로 김섬한(金暹漢)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선조의 유배지인 연안(延安)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하지만 윗글은 단순히 설화로 보이며, 대한민국의 성씨는 고려시대 중반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 대중화 되었다. 조선시대 성씨가 있던 양반의 비율은 10%이하이며, 따라서 성씨가 없던 60~70%의 노비천민들은, 일제시대 일본의 성씨 부여 정책으로, 마음대로 원하는 성씨와 본관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노비천민들은 족보에 올릴 조상이 없었으니, 생각해낸게 과거 중국의 유명인물이나 한반도에서 유명한 인물들을 끌어다가, 자기족보에 일방적으로 올려 성씨와 본관을 이어붙이는 행위가 성행하였고, 이러한 족보세탁 작업중에 조상이 서로 겹치는 웃지못할 경우가 많아, 어쩔 수 없이 생면부지의 사람(노비천민)과 족보를 합쳐서 같은집안으로 만들어버리는, 합본행위도 성행하였다. 따라서 고려시대~조선시대 사이에 만들어진 성씨들만 진짜 양반성씨라고 볼 수 있다. 왜냐면 고려왕건이나 조선왕조의 허락없이, 함부로 성씨를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인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