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편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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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중국 사회의 쇠퇴 조짐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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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0년]]에 일어난 제1차 아편 전쟁은 [[중국]]의 [[아편]] 단속을 원인으로 하여 [[영국]]이 일으킨 전쟁이다.
 
19세기에 들어와 중국 사회는 안정과 번영을 자랑하던 이전과는 달리 여러 측면에서 분명한 쇠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장기적 평화에 따라 꾸준히 늘어난 인구는 이미 세계 인구의 1/4을 차지하는 4억 5000만 정도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를 부양할 수 있는 자원(특히 토지)의 개발이나 생산성 향상 및 기술 발전이 쉽지는 않았으므로 심각한 사회적 불균형과 위기가 뒤따르게 되었다. 잇따른 반란의 발생과 비밀 결사의 출현, 변경 지역으로의 이민 및 분쟁의 증가, 늘어나는 인구나 자연재해 등이 큰 문제로 떠올랐다.
전쟁 발발 당시 영국에 대한 중국의 최대수출품은 [[차 (음료)|차]](茶)였고, 영국의 주요수출품은 [[양모|모직물]]과 [[인도]]산 [[면화]]였다. 양국의 무역수지는 중국의 수출초과 상태가 지속되었기 때문에, 영국으로서는 차 수입을 결제할 [[은]](銀)이 부족했다. 이에 따라 영국은 중국에 [[아편]]을 수출해 무역적자를 해소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에 대처하는 청조의 시도는 대체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는 불행하게도 영국을 중심으로 하르 서양 열강이 '자유 무역'의 주장과 군사력을 앞세워 강력한 도전을 시작하는 때이기도 하였다. 이전부터 형성되어 있던 아시아의 (조공) 무역권에 끼어들어 18세기 후반부터 강자로 등장한 영국은 주로 차(茶), 도자기, 비단, 면직물 등을 수입하고 대신 모직물이나 면화를 수출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 영국에서는 차(茶) 소비가 급격하게 증가하여 중국과의 무역에서 큰 적자를 보았다. 이것을 메우기 위해 영국은 동인도 회사를 통해 인도에서 생산한 마약인 아편을 중국으로 수출하게 되었다.
 
전쟁 발발 당시 영국에 대한 중국의 최대수출품은 [[차 (음료)|차]](茶)였고, 영국의 주요수출품은 [[양모|모직물]]과 [[인도]]산 [[면화]]였다. 양국의 무역수지는 중국의 수출초과 상태가 지속되었기 때문에, 영국으로서는 차 수입을 결제할 [[은]](銀)이 부족했다. 이에 따라 영국은 중국에 [[아편]]을 수출해 무역적자를 해소하려 하였다.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중국의 하층민들 사이에서 아편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아편에 중독된 중국인들로 인해 '동방의 병든 남자'라는 뜻의 '''동아병부(東亞病夫)'''라는 말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이에 청나라는 [[임칙서]]를 내세워 강력한 아편 단속 정책을 펼치고 마약상들을 [[홍콩]]으로 쫓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