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스타시야 니콜라예브나 여대공: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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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유년기 ===
[[File파일:Grand Duchess Anastasia standing on chair.jpg|left|upright|thumb|1906년 사진.]]
그전까지 낳은 자식들이 내리 3명 모두 딸이었기 때문에 후계자가 될 아들을 원했던 러시아 황실은 아나스타시야가 태어났을 때 실망했다. [[니콜라이 2세]]는 해산을 한 황후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1872년)|알릭스]]와 갓 태어난 아나스타시야를 보러 가기 전 한참 동안 혼자 산책을 했다.<ref>Massie (1967), p. 153</ref> 황가의 4녀는 4세기의 순교자 성녀 [[아나스타시야 스렘스카]]의 이름을 붙였다.<ref>[[Helen Rappaport|Rappaport, Helen]] ''The Romanov Sisters''. New York: St. Martin's Press, 2014, pp. 59–60</ref> 딸이 태어난 기념으로 니콜라이 2세는 지난해 겨울에 [[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서 일어난 폭동으로 체포되었던 사람들에게 특사를 내렸기에 "사슬을 끊은 황녀(the breaker of chains)"라고도 불렸다.<ref name="Eagar">{{cite web인용|author=Eagar, Margaret|year=1906|title=Six Years at the Russian Court|work=alexanderpalace.org|url=http://www.alexanderpalace.org/eagar|accessdate=December 11, 2006}}</ref> "아나스타시야"는 그리스 어원(Αναστασία)의 이름으로, "부활"이라는 의미다. 이것이 훗날 아나스타시야 생존설과 결부되어 회자되기도 했다. 아나스타시야의 작위는 [[러시아 여대공|여대공]]({{llang|ru|Великая Княжна|[[벨리키 크냐지|벨리키 크냐즈나]]}}, {{llang|en|Grand Princess}})으로,<ref>Zeepvat, (2004), p. xiv</ref> [[러시아 제국]]에서 황제의 딸과 손녀들은 모두 이 작위를 받았다.
 
니콜라이 2세의 아이들은 비교적 소박하게 자랐다. 아프지 않으면 베개도 없이 간이침대에서 잤고, 아침에는 [[냉수]]로 목욕을 했으며, 방은 정갈히 정돈하고 [[수예]]를 해서 자선사업에 팔았다. 신하들을 포함한 황실 구성원들은 아나스타시야 여대공을 이름과 [[부칭]]으로 "아나스타시야 니콜라예브나({{llang|ru|Анастаси́я Никола́евна}}{{해석|니콜라이의 딸 아나스타시야}})"라고 불렀고, 작위는 붙이지 않았다. 그 외에 이름의 프랑스어형인 "아나스타지({{llang|fr|Anastasie|[anastazi]}})", 러시아식 약칭인 "나스탸({{llang|ru|Настя}})", "나스타스({{llang|ru|Настас}})", "나스텐카({{llang|ru|Настенька}})" 등의 애칭이 사용되었다. 가족들은 아나스타시야를 러시아어로 "작은 것"이라는 뜻의 "말렌카야({{llang|ru|Маленькая}})",<ref>Kurth (1983), p. 309</ref> 또는 독일어로 "장난꾸러기"라는 뜻의 "슈비브지크({{llang|de|schwipsig|슈비프지히}})"라고 불렀다.<ref>Rappaport, p. 103</ref>
 
별명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어린 아나스타시야는 기운이 넘치는 악동이었다. 키는 작고 살이 토실토실했으며, [[홍채]]는 벽안에<ref>Massie (1967), p. 134</ref> 모발은 붉은끼가 도는 금발이었다.<ref name="Vyrubova">{{cite web인용|author=Vyrubova, Anna|title=Memories of the Russian Court|work=alexanderpalace.org|url=http://www.alexanderpalace.org/russiancourt2006|accessdate=December 13, 2006}}</ref> 4자매의 [[아일랜드인]] 유모 [[마거릿 이거]]는 막 걸음마를 배울 무렵의 아나스타시야는 자기가 평생 본 모든 아기들보다 매력적이었다고 회고했다<ref name="Eagar"/>
 
똑똑했다는 말도 있지만, 공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아나스타시야의 선생이었던 [[스위스인]] [[피에르 질라르]], 영국인 [[찰스 시드니 기브스]], 그리고 황후의 시녀였던 [[릴리 덴]]과 [[안나 뷰루보바]]는 아나스타시야를 활기 넘치고 짖궂은 말썽쟁이로, 연기하는 재능이 배우처럼 뛰어나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도 이따금씩 날카로운 재치가 예민한 부분을 지적하기도 했다고 한다.<ref name="Vyrubova"/><ref name="Gilliard">{{cite web인용|author=Gilliard, Pierre|title=Thirteen Years at the Russian Court|work=alexanderpalace.org| url=http://www.alexanderpalace.org/gilliard|accessdate=December 13, 2006}}</ref><ref name="Dehn">{{cite web인용|author=Dehn, Lilli|year=1922|title=The Real Tsaritsa|work=alexanderpalace.org|url=http://www.alexanderpalace.org/realtsaritsa|accessdate= December 13, 2006}}</ref>
 
아나스타시야의 대담한 행동은 때때로 용인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기도 했다. 어의 [[예브게니 보트킨]](나중에 예카테린부르크에서 황제 일가와 함께 총살당함)의 아들 [[글레프 보트킨]]은 아나스타시야가 벌 받을 만한 일을 하기로는 황가에서 기록을 세웠을 것이며, 말썽부리는 분야에서는 실로 천재적이었다고 말했다.<ref name="King and Wilson 2003, p. 250">King and Wilson (2003), p. 250</ref> 아나스타시야는 하인들을 넘어뜨리거나 선생들에게 [[장난]]을 치고, [[나무]] 위에 올라가서는 내려오지 않는 일도 있었다. 한번은 [[폴란드]]의 황실 사유지에서 [[눈싸움]]을 하는데, 아나스타시야가 눈 속에 돌을 넣고 언니 [[타티아나 니콜라예브나 여대공|타티아나]]에게 던져서 그걸 맞은 타티아나가 쓰러지기도 했다.<ref name="Vyrubova"/> 7촌 재종고모([[니콜라이 1세]]의 손녀) [[니나 게오르기예브나|니나 대공녀]]는 “아나스타시야는 거의 사악하다고 할 만큼 고약했다”고 회고했다. 아나스타시야는 놀다가 놀이 상대를 속이거나, 발로 차거나, 할퀴기도 했다. 또 니나가 자기보다 키가 컸기 때문에 그 점을 분해했다.<ref name="King and Wilson 2003, p. 50">King and Wilson (2003), p. 50</ref> 언니들이 하는 것에 비해 아나스타시야는 외모에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러시아 주재 미국 대사 [[포스트 휠러]]의 아내였던 작가 [[헤일리 어미니 리브스]]는 10살짜리 아나스타시야가 페테르부르크 오페라하우스에서 팔목까지 오는 흰색 오페라 장갑을 낀 채로 초콜릿을 먹어 장갑을 더럽히면서도 아무렇지 않아하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ref>Lovell (1991), pp. 35–36</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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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스타시야는 바로 윗 언니인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여대공|마리야]]와 친했다. 마리야와 아나스타시야는 방을 같이 썼으며, 같은 옷을 입는 일도 자주 있었고,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한편 장녀와 차녀인 [[올가 니콜라예브나 여대공|올가]]와 타티아나도 방을 같이 썼는데, 마리야와 아나스타시야를 "작은 짝(The Little Pair)", 올가와 타티아나를 "큰 짝(The Big Pair)"이라고 불렀다. 4자매는 종종 편지에 [[OTMA]]라고 서명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자매들의 이름의 머릿글자(올가의 O, 타티아나의 T, 마리야의 M, 아나스타시야의 A)를 따온 것이다.<ref>Christopher, Kurth, Radzinsky (1995), pp. 88–89</ref>
 
하지만 아나스타시야는 성격이 활기찼을 뿐, 건강은 그리 좋지 않았다. 두 엄지발가락에 모두 [[건막류]]가 생겨 고생했고,<ref>Kurth (1983), p. 106</ref> 등 근육이 약해서 1주일에 2회 [[안마]]를 받았다. 아나스타시야는 이 안마를 싫어해서 침대 밑이나 장롱 속에 숨었다.<ref>Maylunas, Andrei, Mironenko, et al. (1997), p. 327</ref> 1914년 12월, 아나스타시야의 언니 마리야가 발톱 제거 수술을 받던 도중 피가 멎지 않는 사태가 발생한 적이 있었다. 수술 집도의는 당황했지만 황후의 명에 의해 수술을 속행했다. 그것을 본 4자매의 고모 [[올가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올가 여대공]]은 네 명의 조카딸이 모두 모계로부터 유전자를 물려받은 [[혈우병]] 보인자였을 것이라고 믿었다.<ref>Vorres (1965), p. 115</ref> 혈우병 환자가 아닌 보인자도 [[응고]]인자가 적어서 대출혈을 일으킬 수 있다.<ref>Zeepvat (2004), p. 175</ref> 2009년 황제 일가의 유해를 DNA 검사해본 결과, 막내아들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황태자|알렉세이 황태자]]는 [[B형 혈우병]] 환자였음이 확증되었다. 알릭스 황후와 황녀 한 명(아나스타시야 또는 마리야)은 보인자로 확인되었다. 즉, 아나스타시야가 장성해서 아이를 낳았다면 그 아이 역시 혈우병 유전자를 물려받았을 수도 있다.<ref>{{cite web인용|author=Price, Michael|year=2009|title=Case Closed: Famous Royals Suffered from Hemophilia|work=Science|url=http://www.sciencemag.org/news/2009/10/case-closed-famous-royals-suffered-hemophilia|accessdate=March 26, 2016}}</ref> 알렉세이의 혈우병은 만성적이었고 불치병이었다. 알렉세이는 영구장애인이라고 보아야 할 정도로 지속적으로 혈우발작을 일으켰다.<ref>Massie (1995), pp. 159–61</ref>
 
=== 라스푸틴 전횡기 ===
[[File파일:AlexandraAnastasia1908.jpg|left|thumb|모후 알릭스와 아나스타시야 여대공. 1908년경 사진.]]
황후는 황태자의 혈우병을 고치기 위해 방랑 [[스타리츠]]([[동방 정교회]]의 [[구루]]) 출신의 [[그리고리 라스푸틴]]에게 의존하게 되었고, 병든 황태자를 치료하기 위해 온갖 기도와 치성을 드렸다. 황후는 아나스타시야와 자매들에게 라스푸틴을 "친구"로 여기며 그를 신뢰하고 허물을 나누라고 했다. 1907년 가을, 아나스타시야의 고모 [[올가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올가 여대공]]이 오라비 황제와 함께 아이들 방에서 라스푸틴을 만나 보았다. 아나스타시야와 자매들, 그리고 남동생 알렉세이는 라스푸틴 앞에서 잠옷바람으로 있었다. 올가 여대공은 아이들이 라스푸틴을 좋아하고 그를 매우 편히 여긴다고 생각했다.<ref>Massie (1967), pp. 199–200</ref> 라스푸틴이 황자녀들과 우호적으로 지냈다는 것은 그가 아이들에게 보낸 메세지들에서도 확인된다. 1909년 2월, 라스푸틴은 황자녀들에게 “하느님의 자연, 이 지상에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을 사랑하십시오. 주님의 어머니께서는 언제나 화훼와 수예에 열중하셨습니다”라는 [[전보]]를 보냈다.<ref>Maylunas, Andrei, Mironenko, et al. (1997), p. 321</ref>
 
하지만 여대공들의 유모 소피아 이바노바 튜트체바는 1910년 라스푸틴이 여자아이들이 잠옷바람으로 있는 방에 드나든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고 그의 출입을 막아 달라고 요청했다. 니콜라이 2세는 라스푸틴에게 앞으로 아이들 방은 출입을 삼가해 달라고 부탁했다. 아이들은 이런 분위기를 눈치채고 모후가 튜트체바에게 노할 것을 두려워했다. 아나스타샤의 언니 타티아나(당시 12세)는 1910년 3월 8일자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S.I.(소피아 이바노바)가 우리 친구에 관해 무언가 나쁜 이야기를 했을까봐 심한 걱정 …… 유모도 우리 친구와 잘 지내면 좋을텐데.”<ref name="MAMi330">Maylunas, Andrei, Mironenko, et al. (1997), p. 330</ref>
[[File파일:AnastasiawithAlexei.jpg|right|thumb|남동생 알렉세이 황태자와 아나스타시야 여대공.]]
[[File파일:Anastasia in court gown 1910.2.jpg|upright|thumbnail|1910년 예복을 입은 아나스타시야 여대공.]]
걱정대로 튜트체바는 잘리고 말았다. 튜트체바는 다른 황족들에게 전후사정을 이야기했다.<ref>Massie (1967), p. 208</ref> 라스푸틴이 아이들에게 무슨 이상한 짓을 하지는 않은 것 같지만, 황실 일가문중은 발칵 뒤집혔다. 튜트체바는 니콜라이 2세의 여동생이며 5촌 당숙모인 [[크세니아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크세니아 여대공]]에게 라스푸틴이 황녀들이 잠자리에 들 시간에 찾아가 안아주고 더듬으며, 자신에게 라스푸틴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못하도록 황후가 아이들에게 시키는데다, 유모나 시녀들이 알지 못하게 라스푸틴이 몰래 다녀가게 한다는 등의 이야기를 했다. 크세니아는 1910년 3월 15일자 일기에 “알릭스와 아이들의 그 불길한 그리고리에 대한 태도(그들은 마치 그가 성자인 것처럼 생각하는데, 아무리 봐도 저 자는 [[흘리스트파]] 이단이 아닌가!)”를 이해할 수 없다고 썼다.<ref name="MAMi330"/>
 
1910년 봄, 유모들 중 하나인 마리야 이바노바 비슈냐코바가 라스푸틴에게 [[강간]]당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황후는 비슈냐코바의 말을 믿지 않았으며, “라스푸틴이 하는 모든 것은 성스럽다”고 우겼다.<ref>Moss, Vladimir (2005). [http://www.romanitas.ru/eng/The%20Mystery%20of%20Redemption.htm "The Mystery of Redemption"]. St. Michael's Press; retrieved February 21, 2007.</ref> 올가 여대공은 비슈냐코바의 주장이 즉시 수사에 들어가기는 했는데, 라스푸틴이 아니라 웬 [[카자크]] 친위병과 동침하고 있던 젊은 여자를 잡아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후 비슈냐코바는 라스푸틴을 볼 수 없는 자리를 전전하다가 1913년에는 아예 잘려 버렸다.<ref>Radzinsky (2000), pp. 129–30</ref>
 
하지만 상황은 악화일로로, 급기야는 라스푸틴이 황후 뿐 아니라 여대공 4자매까지 홀렸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ref>Mager, Hugo. ''Elizabeth: Grand Duchess of Russia'', Carroll and Graf Publishers, Inc., 1998</ref> 소문은 기름을 끼얹은 듯이 불탔다. 라스푸틴이 황후나 여대공들에게 쓴 편지가 세간에 돌아다녔다. 하지만 현재까지 라스푸틴이 여대공들을 건드렸다는 증거가 밝혀진 바는 없다. 아나스타시야는 라스푸틴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소중하고 유일한 친구께. 얼마나 다시 보고 싶은지 몰라요. 오늘은 꿈에 나타나셨어요. 언제나 엄마에게 당신이 언제 다시 오냐고 물어요 …… 언제나 당신 생각을 해요, 왜냐하면 제게 늘 다정하시니 ……”<ref name="Sams">{{cite web인용|author=Sams, Ed|title=Victoria's Dark Secrets|work=alexanderpalace.org|url=http://www.curiouschapbooks.com/Catalog_of_Curious_Chapbooks/Victoria_s_Dark_Secrets/body_victoria_s_dark_secrets.html|accessdate=December 31, 2006|deadurl=yes|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070107143111/http://www.curiouschapbooks.com/Catalog_of_Curious_Chapbooks/Victoria_s_Dark_Secrets/body_victoria_s_dark_secrets.html|archivedate=January 7, 2007}}</ref>
 
그 뒤 라스푸틴이 황후와 네 여대공들, 안나 뷰루보바와 성관계를 하는 [[포르노 만화]]가 한동안 돌아다녔다.<ref>Christopher, Kurth, Radzinsky (1995), p. 115</ref> 이 지경이 되자 니콜라이 2세는 라스푸틴에게 당분간 페테르부르크를 떠나 있으라고 명령했다. 알릭스 황후는 불쾌해했고, 라스푸틴은 [[팔레스타인]]으로 [[순례]] 여행을 떠났다.<ref>Christopher, Kurth, Radzinsky (1995), p. 116</ref> 이런 추문에도 불구하고 황제 일가는 1916년 12월 17일 라스푸틴이 살해당할 때까지 계속 교류를 유지했다. 알릭스 황후는 1916년 12월 6일 남편에게 “우리 친구가 우리 계집애들에게 얼마나 만족하는지, 아이들이 나이에 맞지 않게 많은 ‘경험’을 했고, 영혼들도 아주 잘 잡혀 있다더라”는 둥 이야기했다.<ref>Maylunas, Andrei, Mironenko, et al. (1997), p. 489</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