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군사정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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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필요 문단|날짜=2009-10-11}}
[[파일:윤치영 1961.jpg|thumb|left|140px|[[윤치영]], [[이승만]]의 최측근이었던 그는 [[장면]] 내각에 큰 불만을 품고 있었다.]]
[[파일:Chang Myon 194804'.png|thumb|right|210px|[[대한민국의 국무총리|국무총리]] [[장면]]]]5.16의 발단은 정군 운동이었다. 이는 곧이어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김종필, 오치성, 김형욱 등 5.16 주체세력의 핵심 멤버 육사 8기생 9명이 1960년 9월 10일 이른바 충무장 결의를 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ref>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4725</ref> 이들은 그해 말에 이르면 박정희를 혁명의 지도자로 세우자는 데에 합의하였다.<ref>{{웹 인용 |url=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37068&C_CC=AZ |제목=보관 된 사본 |확인날짜=2016년 10월 15일 |보존url=https://archive.
군 내부의 알력다툼과 인사적체로 인한 불만을 쿠데타의 원인으로 보기도 한다. 당시 국군은 [[광복군]]과 중국군 출신, 일본군 출신, 만주군 출신, 함경도파, 서북파 등 여러 [[군벌]]로 형성되어 있었다. 창군 직후에는 광복군과 중국군 출신이 중용되었으나, 이들은 [[김구]]와 정치적으로 매우 긴밀한 관계에 있었으므로 [[이승만]] 정권 출범과 함께 주요 요직에서 제거되었다. 이후 이승만은 일본군 출신을 중용하였고, 훗날 이들의 세력이 비대해지자 다시 만주군 출신을 중용하여 일본군 출신을 제거하였다. 이런 와중에 [[박정희]]는 주류 세력에 편승하지 못했고 그와 함께 육사5기, 육사8기 그룹 역시 소외되어 승진길이 막혔다. 결국 이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하극상을 일으키게 되고, 그들이 주도 세력이 되어 하극상파를 이루어 쿠데타를 주도한다.<ref>{{뉴스 인용 |저자=김재홍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 |제목=5.16 세력 '구국혁명'커녕 사리사욕 싸움질 |url=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4681 |뉴스=프레시안 |날짜=2012-07-31 |확인날짜=2015-03-31}}</ref><ref>{{뉴스 인용 |저자1=김덕련 기자 |저자2=최하얀 기자 |제목=오랜 꿈 이룬 '박통'…대한민국은 짓밟혔다 |url=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7702 |뉴스=프레시안 |날짜=2014-06-05 |확인날짜=2015-03-31}}</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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