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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후반 ====
[[1504년]], [[조선 연산군|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과 모의하여 [[조선 연산군|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 사건을 보고하여 [[갑자사화]]를 일으켰디일으켰다. 특히 [[무오사화]]때, 이전에 당한 일에 대한 보복으로 사림파들을 일망 타진했다. 그러나 당시 그의 아들인 [[임희재 (1472년)|임희재]]도, 외사촌 동생인 [[남곤]]도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었던 까닭으로 화를 입었으나 구제하지는 못했다.
 
1504년 [[6월]] 자헌 대부(資憲大夫) 풍성군(豊城君)을 거쳐 [[병조판서]]가 되었다. [[7월]]초 겸 [[예문관]] 제학(兼藝文館提學), 이후 [[이조판서]]가 되었다가 다시 [[병조판서]]에 이르렀지만 [[사림파]]로부터 [[연산군]]의 악행과 폐륜적인 행동을 부추긴 인물로 지목되어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1495년]]에는 아들 [[임광재]]를 [[1505년]] 아들 [[임숭재]]를 병으로 잃었다.